팍팍한 현실의 삶, 대리만족 수단으로 떠올라

▲ 네이버 웹소설 원작 '남주의 첫날밤을 가져버렸다'를 기반으로 연재되는 동명 웹툰 작품(사진=네이버). © 팝콘뉴스


(팝콘뉴스=편슬기 기자)고등학교 3학년인 이연두는 9월 모의고사에서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게 된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하굣길, 성적표 생각에 침울해진 연두는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드는 덤프트럭을 미처 보지 못해 사고를 당하고 만다.

'이대로 인생을 마감 하는구나'라는 생각도 잠시. 다시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에 휘황찬란한 장식의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온다.

천국에 온 건가 싶어 어리둥절한 연두의 시야에 낯선 이들이 들어온다. 왕관을 쓴 중년의 남성과 아름다운 자태의 여성, 그들이 연두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정신이 드느냐, 공주"”라고 말을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선풍적 인기 끄는 '이세계 빙의' 작품


요즘 유행하는 이세계 빙의물의 도입부다.

현실세계의 주인공이 이세계로 넘어가면서 활약을 펼치는 내용의 소설과 웹툰이 최근 독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며 관련 작품이 쏟아지고 있다.

네이버, 카카오페이지와 리디북스 등 소설 및 웹툰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은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주인공이 사는 세계에서 이질적인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내용의 작품의 연재가 이어지고 있다.

이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장르는 '용사물', '회귀물', '빙의물'까지 크게 세 종류로 나눠지며 여기에 액션, 로맨스 등의 요소가 더해지며 남성 및 여성 독자를 사로잡았다.

특히 요즘에는 이세계 로맨스 판타지 작품이 여성 독자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다. 현실 세계에서 로맨스 소설을 자주 읽거나 여성향 게임을 즐겨 하던 주인공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 내 캐릭터에 빙의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야마구치 사토루 작가의 '여성향 게임의 파멸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 영애로 환생해버렸다'(2015년)가 대히트를 치며 본격적인 이세계 빙의 + 로맨스 판타지 장르의 문을 열었다.

보통 로맨스 작품에서 주인공의 라이벌인 악역 캐릭터는 작품의 엔딩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 마련이다.

해외로 이민을 가거나 나라에서 추방을 당하거나 집안이 몰락해 거지 신세를 면치 못하거나 최악의 경우엔 명을 달리하는 경우까지. 주인공에게 못되게 군만큼 여러 종류의 배드 엔딩(Bad ending)이 악역을 기다린다.

그러나 이세계 빙의물의 경우 내용을 전부 숙지하고 있는 좋아하는 작품에 빙의된 만큼 최악의 엔딩을 피하기 위한 주인공의 눈물겨운 노력이 계속된다.

대표적으로 네이버 웹소설(완결)과 웹툰으로 연재 중인 '남주의 첫날밤을 가져버렸다'는 웹소설 다운로드 수 1038만을 기록했으며, 대만과 중국, 태국에서 글로벌 서비스를 통해 선보이고 있다.

카카오페이지에서 연재 중인 웹소설 및 웹툰 '악당의 아빠를 꼬셔라'는 웹소설과 웹툰 조회 수를 모두 합치면 1억 1000만 조회 수를 기록했다.

악역에 빙의하지 않더라도 원작의 주요 인물에 빙의한 주인공들이 앞으로 일어날 거대한 사건의 흐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일찌감치 멀리 망명을 떠나거나 서브 남자 주인공을 좋아해 그와 약혼하기 위해 애정 공세를 펼치는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독자를 즐겁게 해준다.

독자들이 유독 이세계 장르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직장인 서 씨는 "현실 세계에서 힘겹게 살아가느니 차라리 트럭에 치여서 이세계로 가는 게 나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심리를 잘 공략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현실에서 평범했던 내가 이세계에선 세계 최강자라거나, 부유한 집안의 영애라거나 하는 다양한 가능성이 있으니까 작품으로 대리만족하는 것"이라며 이세계 장르를 즐기는 이유에 대해 밝혔다.


괜히 클래식이 아니지 '용사물'


용사물의 경우 현실 세계에서는 평범한 학생이나 직장이었던 주인공이 이세계로 소환되면서 마왕을 물리칠 힘(잠재력)을 가진 용사로 활약하는 내용을 주로 다룬다.

이세계물의 시초 격으로 과거부터 자주 쓰여왔던 소재며 현재까지도 꾸준히 사랑받는 소재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마법기사 레이어스'(1993년), '소년기사 라무'(1997년), '십이국기'(2002년),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2013년) 등이 있다.

이세계로 소환된 용사가 마왕을 물리친다는 소재가 다소 진부해지자 최근에는 변칙적인 '비틀기'를 통해 용사가 마왕이 무서워서 용사의 자격을 포기하거나 어쩌다 보니 마왕과 친구가 되는 등의 색다른 이야기들도 인기다.

주로 밝은 분위기의 작품이 많지만 이세계로 소환돼 용사의 책무를 이행하고 현실로 돌아온 주인공이 절망적인 환경에 놓이는 작품도 있다.

네이버 웹툰의 '왕년엔 용사님'(2020년), '용사가 돌아왔다'(2021년) 등의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마왕을 물리치고 현실 세계로 다시 돌아왔으나 이세계에 가있던 시간 동안 행방불명 혹은 가출 처리돼 집안이 풍비박산 나 있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더해 권선징악의 유구한 전통을 깨고 선이 악에 지고 말았다는 내용으로 출발선을 끊는 작품들도 나타났다.

대신 신의 권능 혹은 전지전능한 존재의 힘으로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되면서 마왕을 물리치기 위해 만반의 준비에 나서는 용사를 다룬 얘기도 고정 독자층을 확보하면서 꾸준한 인기를 자랑 중이다.

웹툰 협회 관계자도 서 씨와 비슷한 의견을 제시했다. 관계자 B씨는 "현실에서의 삶이 팍팍하고 살기 힘들다 보니 현실에서 이뤄지기 어려운, 말 그대로 판타지를 작품을 통해 대리만족하는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서은영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외래교수는 지난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고문을 통해 "오늘날의 20대 독자들(그들이 주로 웹 소설의 소비층으로 예상되므로)에게 가장 친숙한 게임 서사에서 그들은 언제든 '리셋'할 수 있는 환생이나 회귀에 매력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를 줄여 이르는 신조어)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현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좌절이 깊게 깔려 있다"고 말했다.

이어 "어떤 노력을 해도 현실을 바꾸기 힘들다는 인식, 계층의 사다리가 끊어진 현실의 비극을 더욱 잘 알기 때문에 이세계, 환생, 빙의와 같은 소재에 흥미를 느끼는 것이 아닐까"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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