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선택과 이유, 강박적일 필요 없다는 것 보여주고파"

▲ (사진=필앤플랜) © 팝콘뉴스

(팝콘뉴스=권현정 기자)이화여대 학생들이 12년간 모교에서 이어진 고대생들의 '난동'에 카메라를 들어 '성폭력 사건'으로 명명하고, 직장 내 성추행을 법원에서 처음 인정하고, 여성운동가들이 '군가산점 위헌 결정'을 끌어낸 1990년대 말, 매 사건의 중심에는 후일 '영(young) 페미니스트(이하 영 페미)'로 불리는 20대 중심의 여성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2021년, 2010년 중반 페미니스트 리부트 혹은 대중화라고 불리는 움직임과 함께 또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등장했다. 안희정 성폭력 인정, 낙태죄 폐지 운동에 목소리 높이는 2030세대 페미니스트들.

그렇다면, 1990년대 여성운동을 이끌었던 이들 '영 페미니스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에 대해 옛 친구와 질답한 인터뷰집이자, '영 페미'의 활동을 정돈한 역사물, 다큐멘터리 영화 '오늘은 매일매일'의 강유가람 감독을 지난 23일 경복궁역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먼저, 같이


영화를 관통하는 단어 중 하나는 '언니'다.

감독의 전작 '시국페미'는 박근혜 퇴진 운동 한 가운데서 '페미 존(zone)'을 만들고 목소리 낸 '영영 페미니스트(이하 영영 페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하지만, 이들 중 자신을 '영영 페미'라고 지칭하는 이들은 찾기 힘들었다. 종종 그 세대를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 같은 '단절'은 국내 여성운동의 오래된 역사다.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1950년대 호주제 폐지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 21개 여성단체가 연합한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이 꾸린 운동이다. '영 페미' 역시 이들과 일종의 '단절'을 겪었다.

"만나는 장이 펼쳐지거나 교육을 받거나 하는 경우가 없었어요. 여성운동은 매번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영화는 1990년대 영 페미 '자투리'의 제주 여민회 활동을 비춘다. "매번 새로 만들어나가는" 운동을 해왔던 '자투리'는 제주여민회와 함께 '언니'를 처음 받아들였노라 고백한다.

"제주여민회가 제주여성영화제 운영단위거든요. 뵌 적은 있었는데, 회의하고 '으쌰으쌰'하는 이런 모습은 처음 본 거죠. 기획하시는 장면을 처음 봤는데, 에너지가 넘치는 모습이라 정말 좋더라고요."

'언니'의 활약은 이야기 바깥, 영화 제작 과정에서도 이어졌다. 영화계 최초로 스태프 성교육을 실시한 남순아 감독님을 구성작가로 초빙, 협업했다. 영화가 '라떼'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 데 남순아 감독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이 나이대 페미니스트로서 제대로 사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고민을 얘기하니까, 고민이 좋다고 얘기해주시더라고요. 그냥 '영 페미 우리 잘하고 있고, 잘 해왔으니까 우리랑 연결되는 게 어때?' 하는 것보다 ''언니'들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고 모두 각자 고민하는 지점이 있어'라고 하는 게 어떠냐고요. 영화에서도 그걸 녹여내려고 했죠."

'협업할 수 있는 언니'를 만나는 경험은 다시 '함부로 조언하지 않는 언니'가 스스로 되는 쪽으로 종종 방향을 튼다.

영화에는 1990년대 이화여대에서 일어난 고대생 난동사건, 대학 여성주의 연합 '돌꽃', 당시 회원 수 3만 명에 육박했던 온라인 여성주의 커뮤니티 '언니네트워크', 격렬한 집회 현장 등이 바쁘게 흘러간다.

동시에 2010년 지나 발생한 안희정 성폭력 사건, 낙태죄 폐지 운동 관련 집회 현장에도 카메라를 향한다.

"(해시태그, 익명성으로 결집하는 방식이) 깊이 있게 바꿔내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를 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내 나이대, 미디어 환경에 스스로 익숙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판단하는 거잖아요. 현재 운동의 방식으로 n번방 사건 등도 이슈화해낸 거고. 그 운동의 방식도 맞는 것 아닌가(생각해요)."

지금 20대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이해도 더했다.

"집회 보도지침이 철저했어요. 페미니스트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활동할 때 개별화하면 공격당하는 일에 대한 경각심이 있으니까. '지금 여성들에게 어떤 것이 두려운가, 이 사회는 어떤 사회로 느껴지는가'를 알게 됐죠."

잊힌 '영 페미'에 대한 아쉬움을 질문했을 때도 빠르게 답이 돌아왔다. 우리도 그랬으니까, 뭐.

"영 페미 시절 영 페미의 '팬' 입장에서 얘기하면, 그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의 활동에 대해 그 당시 영 페미들도 단절해나가면서 새로운 얘기를 했었거든요. '어라'와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단절'의 방식으로 운동을 하는 게 운동에 동력이 되고 성장할 수 있게끔 한다면 상관없지 않아?' 그러더라고요."


"'페미니스트 상'에 스스로 너무 옭아매지 않았으면"


영화는 강유가람 감독이 '이 나이대 페미니스트로서 잘 하고 있는 것인지'를 스스로 물으면서 시작한다. 감독과 비슷하게 '페미니스트 상'을 두고 충족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것이 영화의 주요 목표다.

때문에영화를 이끄는 또 하나의 축은 '일상'이다. 영화는 운동의 현장을 곁에, 일상의 현장을 중심에 둔다.

여성운동을 펼치다가 지금은 지방에서 수의사로 밥을 벌고 있는 '키라', 10년 차 뮤지션 '흐른', 결혼 후 지방에서 일하고 있는 '자투리', 페미니즘 의료협동조합 살림을 이끄는 '어라'는 여전히 싸우고 여전히 페미니스트로 살지만, 이들의 고민의 중심에는 일상이 있다.

강유가람 감독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때로 뒤로 밀려난 어떤 고민은 '죄책감'이 되기도 했다는 고백이다.

"말을 조리 있게 하고, 잘 싸우는 캐릭터는 아니거든요. 현실에서 페미니스트로서 살아간다는 데 위축감을 느꼈던 적이 많았죠. 영화계 미투 이후 한국독립영화협회 성평등운동에 참여했을 때도 그랬고요.그런데, (영화를 만들면서) 상황에 맞게, 자기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을 때 집중하면서 살면 페미니스트로 사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화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는 부연이다.

"페미니스트로 살아도 모든 선택에 여성주의적 이슈가 있는 건 아녜요. 각각의 선택과 이유들이 강박적일 필요는 없지 않나, 자연스럽게 보여주려고 했어요. 페미니스트로 사는 데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 하고."


'확장'하는 영화


영화는 2019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제주여성영화제 등에서 관객을 만났고, 평단 및 관객의 호평을 받았다.특히, 지금 활동하는 '영영 페미'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냈다.

영화는 세 번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다. 마지막 지원은 텀블벅을 통한 예비 관객들의 지지였다.텀블벅을 통해 모인 금액은 목표금액의 200%를 넘겼다.

"개봉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어요. 작년 코로나19로 개봉이 한 차례 미뤄지기도 했고, 배급사도 그사이 문을 닫았고. 텀블벅도 부담이 됐지만, 사람들이 힘을 보태줄까 우려도 있었고요. 그런데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이 마음을 모아주셔서 펀딩까지 하게 되니까, 이게 페미니스트 연대구나."

영화 속 제주여민회 모습을 통해 또 다른 페미니스트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데 대한 반응도 들렸다.

"제주 여성영화제에서 공동체 상영으로 영화를 먼저 상영했어요. 영화 본분들 중에는 '나이 들어가면서도 페미니스트로 사는 여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는 얘기를 해주신 분들도 계셨고, '나도 친구들의 기록을 너무 하고 싶어졌다'는 얘기도 들렸어요. 영화를 시작으로 '확장'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좋더라고요."

영화를 제작하면서 강유가람 감독은 흐른과 함께 영화에 들어갈 OST를 작업했다. '이토록 깊은 바다'에서 매일매일 헤엄치는 우리는 '서로에게 신호를 보내자'는 노래다.

한 차례 별점 테러 등 홍역을 치른 후 현재 포털의 댓글란은 수많은 응원의 댓글로 가득 차 있다. "필요한 기록",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버티자"는 댓글부터 "영화를 지나온 이야기를 기억하고 앞으로의 이야기도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댓글이 이어진다.

영화 '우리는 매일매일'이 관객을 만나 또 다른 '연결'의 물꼬를 터 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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