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게 망할 수 있는 그날까지

▲ 러블리페이퍼의 기우진 대표(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팝콘뉴스=편슬기 기자) 온종일 동네 곳곳을 돌며 폐지를 모으는 길 위의 이웃들.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폐지를 수집하는 어르신들을, 우리는 곳곳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다.

자원순환사회연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내 폐지 수집 어르신들은 약 175만 명. 엄연히 자원의 재활용을 돕는 직업이지만 손에 쥐어지는 ㎏당 50원의 대가는 하루 벌어 하루를 겨우 버티는 수준의 금액이다.

러블리페이퍼(LOVERE:PAPER)의 기우진 대표(38)는 폐지 수집 어르신들을 보며 이분들이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르신 한 분 한 분이 엄연히 자원의 선순환을 돕는 친환경 사업가임에도 노동과 노동이 낳는 가치가 너무나 저평가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기우진 대표는 현재의 러블리페이퍼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LOVERE:PAPER, 사랑으로 종이를 새롭게 하다


사명인 러블리페이퍼는 'LOVELY PAPER'가 아닌 'LOVERE:PEPER'다. 사랑으로 종이를 새롭게 하다라는 뜻을 품고 있다. 이름에 담긴 의미와 같이 러블리페이퍼는 폐지 수집 어르신들이 모아온 폐지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구매한다.

어르신 한 분당 일주일에 30kg씩을 매입한다. 현재 6명의 어르신이 러블리페이퍼와 함께 근무 중이다.

가격은 ㎏당 300원, 기존의 6배에 달한다. 이렇게 사들인 폐지들은 페이퍼 캔버스로 만들어지고 캘리그래피와 회화 재능기부 등의 과정을 거쳐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재탄생된다. 최근에는 코로나19로 비대면 트렌드가 자리 잡으면서 DIY키트를 지난해 하반기 출시하기도 했다.

지난해는 2,000명이 제품을 구매했고 올해는 연말까지 5,000여 개가 예약돼 있는 상태다.

작품들은 러블리페이퍼 홈페이지를 통해 판매되며 수익은 폐지를 수집하는 어르신들에게 다시 돌아간다. 물론 러블리페이퍼를 운영하는 비용으로도 사용된다.

기우진 대표가 폐지 수집 어르신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개인적인 관심은 이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사회적 제도를 구체화하는 계획으로 이어졌다. 2013년에는 봉사활동을 통해 만든 프로젝트 단체를 일회성으로 운영했다.

처음에는 딱 3개월만 해보자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기우진 대표는 "3개월만 해보고 반응이 좋으면 더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예상외로 많은 관심과 응원을 받으면서 기간을 늘려 1년 동안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말했다.

사업 초기, 여러 가지 실험과 시도를 거듭 반복하며 상품화할 수 있는 캔버스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기존 가격보다 비싼 캔버스를 과연 누가 살까 하는 의문을 가진 기우진 대표는 고민 끝에 캔버스 본래의 기능에 충실하자고 생각했다. 캔버스는 그림을 그리는 바탕이다. 캘리그래피든 회화든 작가들의 재능기부를 받아 하나의 작품을 만들고 이를 판매하는 방식의 수익 구조를 짜냈다.

기우진 대표는 카드 뉴스 형태로 홍보물을 제작해 재능기부 작가 모집에 나섰다. 큰 광고 대행사, 홍보 인력 하나 없이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글 하나가 전부였지만 단시간에 150명의 신청이 들어왔다.

재능기부를 받아 작품을 받고 이를 소비자들에게 선보이기까지 일련의 과정들을 현재 수준으로 끌어올리기까지 시행착오도 꽤 겪었다. 재능기부지만 이를 상품화해 소비자들에게 판매해야 했으므로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가 필요했다. 적당한 가격 산정도 관건 중 하나였다.

기 대표는 "초등학생 친구가 그려준 작품부터 전문 작가가 만든 작품까지 퀄리티도 천차만별에 가격을 작가님께서 임의로 정하는 방식이었는데 6천 원, 8천 원 같이 자신의 작품을 너무 저렴한 가격을 책정하는 분들도 계셔서 정착하기까지 꽤 헤맸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 같은 늙은 사람 써줘서 너무 고맙지"


▲ 러블리페이퍼 매장과 기우진 대표(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러블리페이퍼에서는 3명의 어르신이 정직원으로 근무 중이다. 어르신들과는 모두 길 위에서 만난 인연으로 그 중 정 모(70) 할머니와는 러블리페이퍼를 설립하기 이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정 할머니와의 인연은 기우진 대표가 대안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캄캄한 밤중에 폐지를 수집하고 있던 할머니와 만나 도와드린 일을 계기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러블리페이퍼가 어떤 회사인지, 차후 어떤 일을 하게 될지를 설명하며 다짜고짜 정 할머니의 연락처를 받은 기 대표. 잘 알지도 못하는 청년이 당신을 고용하겠다며 연락처를 달라니 아마 할머니도 그땐 어리둥절하셨을 거라며 기 대표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019년 기 대표는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켰다. 인천 동구에 위치한 러블리페이퍼 1층 매장에서 DIY키트를 만드느라 분주히 손을 움직이는 정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매장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을 두고 세 명의 어르신들이 박스를 접고, 소형 이젤과 붓, 캔버스 등 구성품 넣고 박스 입구를 봉하는 순서로 진행되는 분업은 젊은이들 손놀림 못지않게 빠르고 정확하게 이뤄졌다. 중간중간 담소를 나누면서도 눈은 집요하리만치 박스에 고정된 것이 남다른 전문가 정신까지 느껴질 정도다. 질문을 던질 타이밍을 한참 재다가 끼어들지 못하고 머뭇대자 결국 기 대표가 말문을 터주었다.

러블리페이퍼에서 일하면서 가장 좋은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어르신들은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 "우리 같은 늙은 사람 써줘서 너무 고맙지. 어디 가서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일을 주려고 하겠어? 그저 고맙지 뭐"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어르신들은 경제적인 활동을 하며 일정한 수입을 벌 수 있다는 점 말고도 '함께 일할 수 있는 즐거움'에 대해 기 대표와 종종 얘기를 나눈다.

폐지 수집이라는 일의 특성상 혼자 일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인데 사업장에서 함께 근무하면서 서로를 알고 친구가 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어르신들에게는 또 다른 삶의 보람이다.

기 대표는 "어르신들이 출근길에 나서면서 아침에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참 설렌다고 말씀하신다. 어르신들과 함께 호흡하고 삶의 일부분이 긍정적으로 변화한 것에 보람을 느끼고 뿌듯하다"고 말했다.

현재 러블리페이퍼에는 20대 청년 직원 두 명과 50, 60대 신중년 직원 두 명, 80세의 어르신들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근무 중이다.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기엔 독특한 연령 구성일지 모른다. 하지만 천천히, 느리지만 하나하나 배워가며 서로가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기업으로 나아가고 있다.


여전히 목표는 "멋지게 망하는 것"


기 대표는 러블리페이퍼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 "멋지게 망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 목표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은퇴를 앞둔 세대와 고령자들을 위한 제도들을 완벽히 갖추게 된다면 결국 러블리페이퍼는 필요 없어지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전까진 힘닿는 데로 최선을 다해 친환경적, 친고령자적 행보를 한발 한발 내딛어나갈 계획이다.

우선 러블리페이퍼는 당장 내년에 인천도시공사에서 진행하는 '우리집특화사업' 공모사업에 선정돼 6월 준공 예정인 2층 건물에 입점한다. 1층에는 카페를 두고 2층엔 마을 작업소를 조성해 체험과 일자리를 제공하는 공간을 만든다.

1층 카페 역시 친환경을 모토로 운영되며 다회용기를 사용하고, 커피 찌꺼기도 재활용하는 등 여러 구상안을 마련 중이다. 비정기적으로 운영되는 팝업스토어 개념으로 치매 어르신들이 운영하는 일일카페도 오픈할 예정이다.

저작권자 © 팝콘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