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쫀득하고, 간이 딱 맞았던 떡 맛, '용인떡집'

(팝콘뉴스=강나은 기자)* 백년가게: 30년 이상 명맥을 유지하면서도, 오래도록 고객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곳으로,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실시하는 평가에서 그 우수성과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받은 점포.

가까운 곳, 어쩌면 허름해서 그냥 지나친 곳이지만 우리 주변에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가게들이 많습니다. 30년 이상 이어왔고, 어쩌면 100년 넘게 이어질 우리 이웃은 가게를 운영하며 어떤 사연을 쌓아 왔을까요. 힘든 시기에 몸도 마음도 지친 소상공인은 물론, 마음 따뜻한 사연 있는 가게를 찾는 사람들에게 백년가게를 소개합니다.

▲ 용인떡집 홍금자 사장(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감사하죠. 다른 시장에 비해 여기는 떡, 만두, 순대가 유명해서 시장 자체도 사람이 많은 편이고, 그중에서도 저희 집을 많이 와주시니까요. 다른 떡집 하는 사람들이 우리집 보면, '왜 이렇게 떡을 많이 해놓냐'고 해요. '부럽다'고요."

지금은 잔칫집에 돌리는 떡은 줄었을지언정, 아직도 밤새 떡을 뽑는 일은 종종 이어진다. '떡이랑 만두랑'이라는 이 골목 시장 이름처럼 이 골목에는 떡집만 해도 6곳이 되는데도 이 동네에서 떡 좀 먹어봤다 하는 이들이라면 용인떡집을 찾는다.

여름이라 떡을 매대에 다 내놓지 않는다고 해도 용인떡집에서는 매대가 가득할 정도의 떡이 매일 나오고, 매일 모두 판매된다. 최근에는 코로나19로 인해 행사용 떡 주문은 급감했지만, 그만큼 재택근무나 온라인 수업 등 한 가족이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 간식용 떡이 많이 판매되는 추세다. 파라솔 치고 장사했던 골목길에서 지금의 시장이 될 때까지 한길만을 걸어온 용인떡집은 용인을 대표하는 떡집으로 옛 전통의 떡 맛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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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세와 설움을 딛고 일궈낸 소중한 내 첫 가게


아직도 홍금자 사장은 내 가게를 처음으로 열었던 그날을 기억한다. 1980년 11월, 서울 신촌과 종로 떡집에서 기술자로 일하던 김창석 대표와 결혼하면서 용인으로 자리를 옮겨왔고, 여기에서 용인떡집을 열었다. 이제 내 사업을 하겠다고 찾아온 이곳은 그 당시에는 시장이라기보다는 그저 파라솔 아래에서 약간의 물건을 팔고 사던 골목길에 가까웠다. 비 오면 질퍽질퍽하게 신발이 흙으로 엉망이 되고, 햇빛을 막는 것이라고는 낡은 파라솔이 전부였을 때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주변 지역은 시골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이곳에 자리를 잡고 난 뒤 5년간은 타지에서 왔다는 이유로 텃세를 많이도 당했다. 서러워 울기만 했던 날들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떡집이라고 해서 허가를 받는 시기가 아니었어. 게다가 남편이 기술자였다가 첫 가게를 냈으니 그런 절차가 있는지도 잘 몰랐고, 다 빚으로 가게를 시작했으니 얼른 돈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빴지. 그런데 뒤늦게 허가를 냈다고 해서 어찌나 쌍욕을 먹었는지 몰라."

게다가 동네에 승용차 가진 사람이 드물었을 정도로 떡을 자주 사먹을 만한 수요층도 많지 않았다. 그나마 몇 안 되는 부자들은 수원에 나가서 바람떡을 사오곤 했고, 그 외에는 인절미나 절편, 가래떡도 팔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힘겹게 가게를 지켜올 수 있었던 건 떡을 맛본 손님들의 인정이 쌓였기 때문이다. 한 명, 두 명 단골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한 용인떡집은 1985년쯤 가장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용인에서 잔치를 해야 하는 집은 용인떡집에서 떡을 해갔다. 기본 한 가마니, 손님 많은 집에서는 두 가마니씩 떡을 해가니 떡이 맛있기로 유명했던 용인떡집은 일주일에 이삼일은 밤을 새워서 떡을 뽑았다.

"잔칫날이면 잘사는 집은 갈비탕, 못사는 집은 국수를 했는데, 잘사는 집이든 못사는 집이든 떡은 꼭 해야 했지. 게다가 잔칫상에 깔리는 떡은 한두 점 먹으면 그만이지만, 싸주는 떡이 많았거든. 그래서 떡을 많이 했지."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쉴 새 없이 일만 하자, 아이들과 얼굴을 마주할 시간도 부족했다. 용인에 내려올 때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으니 막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이었는데도 재우고 나오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아무리 좋은 집을 준다고 해도 먼 데는 못 살았어. 애들이 잠에 깨서 그냥 맨발로 걸어 나올 수 있을 만한 집, 5분밖에 안 걸리는 곳에서 살아야 했지. 지금도 마찬가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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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귀하게 먹었던 정감 가던 그 떡 맛


단골들은 용인떡집의 떡을 '옛날 떡 맛'이라고 말하곤 한다. '요즘 떡에는 이것저것 맛을 가미한 것 같은데, 용인떡집은 어렸을 때 먹었던 그 떡, 간이 딱 맞고, 쫀득쫀득한 떡을 만든다'는 것이다.

"사실 요즘에는 다른 집들도 가미하지 않는데, 다들 우리 집 떡이 전통 옛날 떡이라고 하시더라고. 나는 다른 집 떡은 잘 안 먹으니깐 잘 모르긴 하지만."

특히 용인떡집에서 가장 인기 있는 떡은 호박떡, 영양떡 등 고물이 많이 들어간 떡 종류다. 서울, 인천 등 각지에서 이 떡 맛을 잊지 못해 찾아오는 일이 다반사다.

"인천에서도 가끔 오시는 분이 계신데, 미안하더라고. '저희는 감사한데, 차 타고 여기까지 오시면 시간도 많이 뺏기시지 않냐, 가까운 데서 드시죠'라고도 말해봤는데, 이 맛이 안 난대. 맛있는 집이라고 해서 떡을 맞춰봐도 이 맛이 안 난다고 꼭 여기 와서 드셔."

그뿐만이 아니라 맞춤 떡을 하고 나서 행사를 치르고 전화상으로 '맛있게 먹었다', '감사하다'는 이들도 많고, 일부러 와서 인사하는 이들도 많다. '자기는 떡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떡이 맛있는 줄 처음 알았다'면서 몇 번이나 손님을 대접할 일이 있으면 여기에서 꼭 떡을 맞추는 손님도 있다. 그 손님은 딸 개업식에도 떡을 맞춰서 갔고, 얼마 전 우연히 딸과 마주쳤을 때, 딸은 반갑게 홍금자 사장에게 인사하며 남편에게 말했다. "그 우리 개업식 떡! 그 떡집 사장님이셔."

"이 맛 저 맛 다 본 사람들이 우리 떡을 맛있다고 해주니 그래도 우리가 여태까지 잘 만들었구나 싶지."

용인떡집의 비결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좋은 재료를 쓰는 건 물론, 매일 매일 쓰는 쌀이 완벽히 같은 품질은 아니라는 것을 손끝으로 느끼고, 물을 더 넣거나 덜 넣는 것, 뜸을 어느 정도 시간 동안 들일지를 결정하는 것 모두가 노하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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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어온 맛을 앞으로 이어가기 위한 후계자 수업


용인떡집은 백년가게라는 이름에 걸맞게 미래에 대한 준비도 일찍부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밤낮없이 떡을 만든 모습을 봐왔기에 떡집은 안 하겠다고 하던 아들은 여러 일을 거쳐 다시 떡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아들도 처음에는 이거 안 한다고 그랬어. 너무 힘들잖아. 게다가 자기가 봐도 엄마, 아빠가 애와 대화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으니까. 그런데 무슨 일을 하든, 어디를 가든 이 정도 노력 안 하고 먹고사는 일이 없거든. 남의 돈 받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남의 돈 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에' 후계자 수업도 혹독하게 시켰다. 용인떡집에서 배우는 대신 김창석 대표 지인이 하는 떡집에서 처음부터 일을 배웠다.

"부모 밑에서 배우면 어물쩍하게 배울까 봐서 그랬지. 다른 데서 고생을 좀 하다 와야지, 이게 새벽일이라 제 엄마 아빠 밑에 있으면 새벽에 나오지도 않아. 또 다른 데서 어떻게 떡 만드는지를 배워야 여기 왔을 때 더 적응도 빠를 테고."

그렇게 2~3년이 지났을 때였다. 1대 김창석 대표가 심장 수술을 하게 되면서 2대 김충헌 대표는 예상보다 빨리 가게를 물려받고, 용인떡집에서 제대로 일을 하고 있다. 올해로 벌써 떡을 배운 지 6년 차가 되면서 대표로서의 역량을 키워나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피아노 강사로 있던 딸은 오래전부터 시간 날 때마다 와서 가게 일을 도왔다. 아들이 떡집을 물려받지 않는다고 했을 때도, '그럼 자신이 맡겠다'며 떡집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던 딸이었다.

"손님들이 나보다 우리 딸을 더 좋아해. 나는 사근사근하게 잘 못 하는데, 우리 딸은 그런 걸 잘하거든. 그래서 나한테 오히려 '그렇게 하면 안 돼, 엄마' 하는데, 나도 배워서 그나마 나아졌지만, 그래도 타고난 사람이 잘하지."

이렇게 아들, 딸이 가게를 맡을 준비가 되어있어도 1대 김창석 대표와 홍금자 사장 역시도 매일같이 떡집에 나와서 일한다.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데까지는 도와줘야지. 집에서 놀면 뭐 해. 게다가 떡집에서는 사람을 쓰면서 일하기가 힘들어."

여러 번 직원을 두고 일해 본 홍금자 사장은 직원 여러 명보다 가족 한 명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사 떡이 예약된 날, 새벽에 출근해야 하는 날이면, 직원이 무단으로 안 나올 때가 많았다. 차라리 미리 그만두겠다는 언질이라도 있었다면, 그 시간만큼 일찍 나와서 준비했을 텐데, 준비 없이 당하고 나면 허둥지둥해야만 했다.

가족이 아니라면 함께 하다가도 금세 그만 둘 정도로 떡집 일은 힘에 부치는 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정도 힘이 들어야 비로소 잔칫날 손님에게 대접해도 남부끄럽지 않은 떡 맛이 나온다. 그 맛을 지키기 위해 용인떡집은 오늘도 온 가족이 새벽부터 구슬땀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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