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팝콘뉴스=편슬기 기자) 여기 22살의 나이에 혈액암 판정을 받은 남자가 있다.

그야말로 창창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젊은 나이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들은 윤슬케어의 정승훈 대표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2012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자신의 앞에 펼쳐진 무수히 많은 가능성과 부푼 꿈을 품고 있던 청년은 공군 장교도, 대기환경과학이라는 전공을 살릴 기회도 뒤로 한 채 살기 위한 치료에 전념해야 했다.

보건복지부와 중앙암등록본부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우리나라의 한 해 신규 암 환자는 24만 3837명으로, 이중 발생률이 높은 암은 위암, 갑상선암, 폐암, 대장암 등 순이다.

1999년 이후 암 확진을 받아 2018년 기준 치료 중이거나 완치된 사람은 201만 명으로, 우리나라 국민 25명당 1명이 암 유병자에 해당할 정도로 그 수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심리적 지원과 외부적 편견, 차별은 여전한 것이 현실이다.


암 환자 멘토링, 경험에서 빗댄 충고와 위로


▲ 윤슬케어 정승훈 대표와 힐링 다이어리 '암보다 강한 당신'(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암 판정을 받은 환자들은 그 순간부터 암세포와의 고독한 싸움을 시작한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암세포뿐만 아니라 정상세포들도 영향을 받으며 피부염, 탈모, 식욕부진과 구토 등 다양한 증상이 신체에 나타난다.

곳곳에 나타나는 항암치료의 부작용과 밤낮을 가리지 않는 통증 외에도 치료를 받고, 경과를 확인하고, 버티고 견뎌내는 나날의 반복은 환자를 정신적으로 몰아붙인다.

피를 나눈 가족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들이라도 나눌 수 있는 어려움은 한계가 있다 보니 암 환자는 주로 같은 병실에서 함께 투병하는 환자들과 서로를 격려하는 돈독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정승훈 대표도 혈액암 치료를 위한 투병 생활을 시작하면서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는 이 땅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숨을 거둬 가시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종교에 대한 신앙심 덕분인지 모르겠으나 치료 끝에 독한 암세포를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혈액암으로 고생하는 환자를 돕는 비영리단체에 입사하게 됐다.

그곳에서의 경험은 암 환자들을 직접 돕고자 설립한 '윤슬케어'의 밑거름이 됐다.

윤슬케어의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잔물결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잠깐 빛나고 사라지는 눈부심이 아닌, 수많은 반짝임이 모여 함께 찬란하게 빛나자는 뜻을 담았다.

사명이 담은 뜻과 같이 윤슬케어에서 제공하는 '동행' 서비스는 암 치료를 마친 선배 환자가 서비스를 신청한 환자에게 자신의 경험을 공유해 위로와 격려, 병을 이겨낼 수 있다는 용기를 '멘토링'을 통해 전하는 서비스다.

대신 선배 환자의 경험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대체의학이나 민간요법 등 '의료적 개입'은 최대한 배제하고 보다 정제된 정보 전달과 '멘토링'에만 집중한다.

현재 윤슬케어에서 동행멘토로 활동하는 이들은 5명이며 모두 암 치료를 마치고 일상에 복귀한 환자들이다. 자발적인 신청을 통해 동행멘토 양성과정에 참여하게 되며 ▲병에 대한 이해 ▲국민건강보험제도 ▲관계와 소통 ▲멘토 윤리 등 수업을 거쳐 멘토로 거듭나게 된다.

또한 온오프라인 모임인 '모임'을 통해 암 경험자들이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 활동도 주도하고 있다.

투병 생활 중 '나'를 잃지 않도록 내가 좋아하는 노래와 영화, 오늘의 감사한 일은 무엇이 있었는지, 지난해 가장 즐거웠던 기억은 무엇인지 등 차분히 생각하고 기록할 수 있는 일지 작성을 함께할 수 있는 모임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천체관측, 샌드아트, 북한산 자락길 투어 등 암 환자의 눈높이와 입장에 맞춘 일상 활동을 체험할 수 있다.


암 환자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 개선


▲ 힐링 다이어리 '암보다 강한 당신'(사진=윤슬케어). © 팝콘뉴스

암 환자들은 치료를 마치면 일상으로 복귀할 준비를 한다. 그러나 곳곳에 뿌리박힌 '편견'이 발목을 잡아 일상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정승훈 대표는 "보통 친구와 만나서 뭘 하시나요?"라는 질문 뒤 "만약 친구 중 암 치료를 마친 환자가 있다면 만나서 뭘 하시겠어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몇 글자만 더 추가됐을 뿐인데 두 질문은 판이한 대답을 유도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을 마시러 간다는 대답은 몸에 좋은 건강식을 먹으러 간다는 답변으로, 한적한 곳으로 여행을 떠나겠다는 여름휴가 계획은 근처에 병원이 있는 적당한 도심 근처로 여름휴가를 간다라는 계획으로 바뀌었다.

모두 치료가 끝난 암 환자이더라도 체력적으로 힘들거나 병원을 방문해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서 온 편견에 의한 답변이다.

정 대표는 "환자를 배려하기 위한 말과 행동 등도 이들을 향한 차별과 편견이 될 수 있다"며 생각 외로 '배려'가 '차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시사했다.

실제로 삼성서울병원이 2017년 10월부터 2018년 3월 사이 암 생존자 43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암에 대한 편견과 직장 내에서 겪은 차별' 조사 결과 암 진단 후 직장을 잃었다고 응답한 경우가 24%(104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친구나 이웃들이 암 환자인 자신을 외면한다고 생각한 이도 각각 24.2%와 22.4%였다. 암 환자 스스로가 암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의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암을 치료할 수 없을 것이라 여긴 환자는 21.7%였으며 19.1%는 암이 완치되더라도 예전과 같은 업무 수행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암 환자를 외모만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대답한 사람도 13.4%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이러한 결과가 나온 이유로 암 생존자가 200만 명을 넘어섰지만 여전히 암 환자의 일상성 회복에 관한 관심과 지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정 대표는 병원에서는 환자의 완치에 중점을 두지만 치료를 마친 환자들이 퇴원 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혼란을 겪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고 설명했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일러주는 이도 없고 마땅한 가이드라인도 없는 현실에 환자들의 당혹스러움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그는 지역마다 동등한 치료의 기회를 주고 암 환자들을 위한 문화 공간, 정보를 교환하고 응원과 격려를 전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면 이러한 혼란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지역사회 단위로 암 환자를 돌볼 수 있는 '커뮤니티 케어' 즉, 사회적 안전망이 일상생활 곳곳에 조성돼야 할 필요성을 제시하며 앞으로 윤슬케어가 환자들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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