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구 증산동 '천국골목' 만든 도상철 씨...장애인들 위해서도 30년간 일해

▲ 도상철 회장.(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팝콘뉴스=박윤미 기자)* 울타리[fence]: 모든 사람이 가족과 이웃이 되는 이야기들.

대부분의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부모와 가정, 학교 같은 ‘사회적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간혹 울타리 없는, 누구보다 울타리가 필요한, 울타리 밖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스스로 울타리를 걷어찬 이들도 있습니다. 코너 [울타리]는 그런 이웃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독자들의 관심이 그들에게 필요한 울타리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신설한 코너입니다. 기사를 읽는 동안만큼은 마음의 울타리를 활짝 열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누군가, 누군가를 위해서 뿌린 씨앗은 꽃이 됐다. 그리고 그 꽃은 마을을 천국으로 만들었다.

서울시 은평구 증산동의 한 작은 골목(백년주택에서 구립 은평어린이집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계단과 계단 오른편 작은 길)에 사는 주민들은 매년 봄의 귀환을 일기예보가 아닌 특별한 존재로부터 전해 듣는다. '봄의 전령사'가 이 골목에 살고 있다나.

봄 요정 덕분일까. 열다섯 가구가 사는 이 골목은 지난해 김미경 은평구청장으로부터 '천국골목'이라는 특별한 이름도 선물 받았다. 물론 그전에도 이곳 천국골목은 많은 이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누구는 이곳을 '요정이 사는 마을'로, 누구는 '그림 같은 곳'으로 불렀다.

이 골목에는 다알리아, 초롱꽃, 수국, 카네이션, 메리골드, 칼랑코에, 히어리, 꽃기린, 매발톱, 서양톱풀 등 그 종류와 숫자를 헤아리다 보면 헷갈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꽃이 자리 잡고 있다. 가지, 고추, 상추, 토마토 같은 채소들도 꽃들 사이에서 제 색을 뽐내며 열심히 열매 맺는 중이다. 꽃 있는 곳에 나비 없을까. 지칠 줄 모르고 날갯짓하는 나비군단도 '열일 중'이다. 누구 말마따나 이곳, 한 폭의 그림이다.

골목이 예쁘다 보니 아는 사람만 안다는 이 골목을 일부러 찾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가까운 어린이집에서는 맑은 날 으레 이곳을 산책 코스로 삼는다.

▲ 서울시 은평구 증산동 꽃 골목.(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증산동 천국골목은 이곳에 사는 주민 도상철(68) 씨의 손에서 비롯됐다.

2011년 도상철 씨가 이 동네로 이사했을 때만 해도 천국골목은 지금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골목 곳곳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배어있었고, 주민들이 아무렇게나 내다 버린 쓰레기들은 골목을 흉물스럽게 만들었다. 쓰레기는 악취뿐 아니라 주민 간 다툼까지 일으켰다. 불량청소년들은 밤이면 술병과 담배를 들고 찾아와 골목을 아지트 삼았다. 그렇게 골목 안에는 밤이면 공포가, 아침이면 빈 술병과 담배꽁초가 깔렸었다.

"밤만 되면 골목이 무섭다"는 말을 딸들에게서 들었던 날, 도상철 씨는 밤새 골목의 변화를 고민했다. 그 밤 천국골목에 작은 꽃씨 하나가 떨어졌다.

도 씨가 뿌린 씨앗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마치 나비효과와 같았다. 주민들이 밤과 새벽 몰래 내다 버리던 쓰레기는 자취를 감췄다. 자연히 소란도 사라졌다. 아지트의 변화를 못마땅하게 여긴 밤손님들도 골목을 떠났다. 주민들은 골목 안에서 자연스럽게 인사와 대화를 나눴다. 정은 저절로 따라붙었다. 꽃과 채소를 가꾸는 여러 명의 웃음소리는 천국골목의 배경음악이 됐다. 더는 이 골목을 두고 무섭다거나 삭막하다고 말하는 이는 찾을 수 없게 됐다.

▲ 은평구에서 천국골목으로 명명한 증산동 꽃 골목. 은평구청장 명의의 팻말.(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골목의 기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골목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니 관에서도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덕분에 누구 하나 관심 없던 회색의 낡은 시멘트 계단은 꽃 골목과 어울리는 예쁘고 튼튼한 계단으로 새로 만들어졌다. 지난해 서울시에서 주관한 '2020 푸른도시 서울상 콘테스트'에서는 민간주도 골목길 부문 '우수상'까지 받았다. '천국골목'이라는 브랜드도 이 시기 만들어진 것이다.

도상철 씨는 "서울시 공무원들이 현장을 방문했을 때, 지금의 한 장면만을 보지 마시고 그동안 이 골목 안에서 이뤄진 수많은 노력과 역사를 봐달라고 했다"며 "상이나 칭찬을 바라고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서류 제출을 위해 나름 골목의 변천사를 모으다 보니 뿌듯한 마음이 들더라"고 말했다.

이어 "이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가끔 눈에 띄는 쓰레기들만 치우는 정도였는데, 그것만으로 골목에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할 줄 아는 것은 없지만, 내 천성이 부지런한 편이고 또 30년째 다니는 서영교회에서 장로로 활동하며 꽃을 관리하고 있어 '꽃이라면 부지런히 관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꽃을 매개체로 동네 분위기를 바꿔나갔다"라며 "물론 골목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흙을 구하는 일도 어려웠고, 과실수 관리는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고 그 과정을 되짚었다.

그는 또 "화분 수백 개를 가꾼다는 게 사실 시간도 많이 잡아먹고 노동력도 꽤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꽃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변화를 맛본 이상 앞으로 우리 골목과 닮은 증산동의 다른 골목들을 찾아 제2, 제3의 천국골목을 만들어 보고 싶다"며 "간혹 사람들이 꽃이 그렇게 좋으냐고 묻는다. 나도 모르겠다. 좋아서 하는 건지, 이 일을 해서 좋아진 것인지"라고 덧붙였다.

▲ 도상철 회장이 꽃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꽃 골목의 시작 도상철 씨는 보통의 아저씨지만,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장애인계에서 잔뼈가 굵기로 소문난 사람. 무려 30년이나 장애인계에서 일했다. 지금도 장애인정보협회 부회장, 장애인정보신문 회장 등의 직함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처음에는 장애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휠체어밖에 없을 정도로 무지했다"던 그. 그런 그가 비장애인으로서 대한민국 장애인 사회의 변화와 역사의 산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1992년 휠체어 회사에 입사하면서다. 장애인의 눈으로 장애인을 보고 이해하고자 했던 마음의 꽃씨는 당시 움텄던 것.

이후 도상철 씨는 휠체어 펜싱 후원회장, 장애인문화협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푸른하늘의 대표 등 장애인 인권, 체육, 문화 등 여러 방면을 거치며 다양한 활동을 했다. 장애인 연날리기 대회, 대전과 서울의 휠체어 농구팀 간 경기, 구족화가의 미국 뉴욕 전시 등 당시로선 황무지라는 표현이 적절하던 때에 일을 벌인(?) 것 역시 그다.

▲ 선의의 씨앗이 꽃이 피웠다.(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도 씨는 "중도 장애인들 같은 경우 예전 같으면 10년이 지나서야 겨우 몇몇이 집 밖으로 나오곤 했는데, 요즘은 사고 직후 자활 의지를 갖고 밖으로 나오는 이들이 많다. 그만큼 장애인 관련해서도 사회적인 시스템이 잘 정착됐다는 의미"라며 "지금 생각해보니 30년 전에는 소수의 장애인이 세상을 움직여 왔다.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당시에 그들이 뿌린 씨앗은 오늘날 꽃이 됐고 열매가 됐다. 가장 보람 있는 것은 요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됐다는 점과 장애인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 나아가야 할 길이 멀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힘을 모아 함께 걸어가는 만큼 장애인들을 위한 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에 그는 "결국 골목의 변화도 장애인 사회의 변화도 많은 사람이 지속해서 힘을 모으고 관심을 가진 덕분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사람 사는 곳은 결국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여야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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