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민주주의'

(팝콘뉴스=편슬기 기자)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한 문장으로 압축해 표현하라고 하면 이보다 더 마땅한 표현이 없을 것이다.

독재 시절 속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 등 민주주의와 자유를 온몸으로 부르짖었던 이들의 기록은 책으로, 영화로 만들어져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바로 어제 9일은 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시위 최전선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 최루탄이 두부를 강타하면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고 이한열 열사의 34주기 추모식이 있었다.

그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한열동산에서 열린 추모식은 코로나19로 온라인을 통해 실시간 중계됐으며, 그의 친필 글씨체를 복원해 만든 '이한열체'를 홈페이지에 배포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한열 열사의 영혼을 기렸다.


학생 운동, 그리고 6.10 민주화 항쟁


▲ 이한열 기념관 전경(사진=팝콘뉴스). ©팝콘뉴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사인을 발표했던 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며 시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은 더욱 간절해졌다. 이 사건은 전국 각지에서 계속됐던 시위에 기름을 끼얹으며 더욱더 많은 이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됐다.

민주화 항쟁을 앞둔 하루 전, 전국 대학의 교정에서는 사전 집회가 개최됐고 연세대학교도 그중 하나였다. 총궐기 대회에서 시위대 맨 앞줄에 섰던 고 이한열 열사. 그는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고 크게 다쳤다.

친구들에 의해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27일간 사경을 헤맸고 7월 5일 새벽 2시 5분, 향년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의 씨앗은 전국으로 퍼져 곳곳에서 싹을 틔웠다.

전두환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노태우에게 권력을 이양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할 예정인 6월 10일에 맞춰 시위는 비밀리에 준비됐다. 마른 들녘에 이는 불길처럼 거세게 타올랐고 빠르게 대한민국 전역을 뒤덮었다.

시위를 계획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는 일반 국민의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인 6시에 맞춰 시위를 시작하기로 했다.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버스에 탄 시민들, 택시를 운전하던 기사들, 퇴근하던 직장인들 등이 자연스럽게 시위 무리에 합류해 함께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다.

시위는 한동안 계속됐고 6월 29일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의 직선제 수용 선언이 이뤄졌으며 7월 9일 고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을 마지막으로 6월 항쟁은 종료됐다.

이때 장례식에 참여한 시민들은 경찰 추산 100만여 명으로 연세대에서 명동까지 고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추모를 위해 참가한 인파로 빽빽이 채워졌다.


이한열 기념관, 그날의 기억을 전시하다


▲ 고 이한열 열사가 시위 당시 입었던 옷가지(사진=팝콘뉴스). ©팝콘뉴스

신촌 번화가 중심에서 살짝 벗어난 골목길로 접어들어 걷다 보니 주변이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자동차와 버스가 줄지어 오가는 소음과 길을 바삐 오고 가던 인파가 무색하게 기념관으로 향하는 골목과 주변은 꼭 그 부분만을 떼어 놓은 것 마냥 고즈넉하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이한열기념사업회가 운영 중인 이한열 기념관은 고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인 배은심 씨가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과 시민 성금을 모아 2004년 문을 열었다.

열사가 시위 당시 입고 있던 옷과 운동화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낡고 풍화돼 가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했던 시민들이 그가 지키고자 했던 민주주의와 열사를 기억하기 위해 하나둘 힘을 보탰다.

왼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고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며 열린 각종 행사의 포스터가 눈에 띈다. 이 중에는 영화 '1987' 포스터도 있다. 조금 더 계단을 밟아 올라간 곳엔 어린 학생들이 서툰 글씨로 이한열 열사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편지도 볼 수 있다.

전시회 입구 맞은편에는 기념관 개관 당시 연세대 동문들과 그를 아낀 지인들이 남긴 문구가 정사각형 모양의 타일에 빼곡히 들어차 있다.

기념관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이곳에 전시된 고 이한열 열사의 물품들은 당시 긴박했던 민주주의 태동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1층에는 열사를 추모하는 뜻에서 만들어진 영상과 곡, 시 등이 전시돼 있고 2층에는 열사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일생과 함께 시위가 일어나게 된 배경, 당시 입고 있었던 옷가지 등 사진에서만 보았던 것들을 전시 중이다.

그 외에도 열사가 몸에 지니고 있던 소지품과 대학 생활 중 작성했던 편지 등 살아생전 성격과 성향 등을 짐작게 하는 전시물들을 확인할 수 있다.


민주주의 정신을 더 멀리, 더 많이


▲ 고 이한열 열사를 기리는 이들이 남긴 글(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1987년 7월 5일 열사의 장례식으로부터 한 달이 지난 8월,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이들이 모여 '고 이한열 열사 추모사업회'를 만들었다.

1989년 '이한열 추모사업회'로 명칭을 바꿔 열사의 추모 사진집을 발간하고 추모비를 그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옆 동산에 세웠다.

2008년에는 이한열 장학회를 꾸려 매해 6월 중순부터 말까지, 12월 중순부터 말까지 장학생 신청을 받아 이 중 선발된 이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장학회 조성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점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 가는 열사의 존재를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연세대학교 85학번 동문들은 "요즘 젊은이들은 한열이를 모른다, 한열이를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 그렇다면 장학금을 만들자. 장학금을 받은 친구만이라도 한열이를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해 장학회를 만들고 지원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222명의 학생에게 3억 2천만 원가량의 장학금이 지급됐으며 오는 6월 중순부터 2021년 장학금 신청이 개시될 예정이다.

2018년부터는 연세대학교와 함께 해마다 이한열 학술제를 개최해 숭고한 민주화 운동 정신을 학술적으로 고찰하고 기리기 위해 개최 중이다.

또한, 이한열 문학상 공모전을 개최해 시와 소설을 접수하고 시 분야 당선자에게 50만 원, 소설 분야 당선자에게 100만 원의 상금을 수여하다. 열사가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 만화동아리에서 활동하며 민주화 운동을 펼친 뜻을 기리기 위한 이한열 만화상 공모전도 진행하고 있다.

시위대의 선두에 섰던 이한열 열사는 자신의 이름 한열 중 열은 매울 열(熱)로 자신과 최루탄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다고 그가 전투경찰과 최루탄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를 알던 친구들은 "한열이는 시위 때 맨 앞에 서는 게 무섭다고 했고, 그런 솔직함으로 과격한 남학생들한테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했다"고 열사를 기억했다.

그는 지극히 인간적이었고 그랬기에 앞장설 수 있었다. 두려움이 있기에 사람은 비로소 용감해질 수 있다.

이한열 열사는 토론 때 "행동하는 양심으로 부끄럼이 없어야 한다"는 표현을 즐겨 썼다고 한다. 우리가 이전과 같이 피를 흘려 민주주의를 사수해야 할 일은 없지만 행동하는 양심이었던 고 이한열 열사가 있었음을, 그가 흘린 피가 민주주의의 토대를 세웠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추모함으로써 행동하는 양심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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