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들의 추억을 귀하게 여겨주며 마음을 다독이는 평양냉면

▲ 만포면옥 2대 대표인 지용석 대표(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팝콘뉴스=강나은 기자)* 백년가게: 30년 이상 명맥을 유지하면서도, 오래도록 고객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곳으로,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실시하는 평가에서 그 우수성과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받은 점포.

가까운 곳, 어쩌면 허름해서 그냥 지나친 곳이지만 우리 주변에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가게들이 많습니다. 30년 이상 이어왔고, 어쩌면 100년 넘게 이어질 우리 이웃은 가게를 운영하며 어떤 사연을 쌓아 왔을까요. 힘든 시기에 몸도 마음도 지친 소상공인은 물론, 마음 따뜻한 사연 있는 가게를 찾는 사람들에게 백년가게를 소개합니다.

"주로 어머님이 요리하셨는데, 어머님은 '음식 갖고 속이지 마라'는 말을 가장 자주 하셨어요. 예를 들어서 요즘 채솟값이 비싸잖아요. 그럼 장사하는 입장에서는 비싼 채소 대신 비슷한 싼 채소로 대체해서 팔 수도 있지만, 엄마는 결코 용납 안 하셨죠. '재룟값이란 항상 비쌀 때가 있으면 쌀 때가 있으니 똑같이 제일 좋은 재료로 항상 똑같은 맛을 내라'고요."

실향민이었던 아버지, 어머니의 뜻을 이어 2대 대표인 지용석 대표 역시도 공동대표인 사위, 김건우 대표에게 항상 이 말을 당부하곤 한다. 만포면옥에서 만드는 모든 음식은 고향의 맛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곳, 하지만 차마 닿을 수 없어서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던 곳, 이런 고향을 찾고 싶은 이들에게 건네는 한 그릇의 위로를 건네는 것이 실향민으로서, 실향민의 자녀로서 해야 할 일임을 믿기에 오늘도 만포면옥에서는 고향의 정성을 담아 음식을 낸다.


실향민들의 그리움을 달래주었던 평양냉면


제1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지옥문'으로 제작상을 수상했던 지해성 영화제작자는 1972년, '만포면옥' 평양냉면집을 개업했다. 어쩌면 평생의 꿈보다 현실을 택해 개인으로서는 마음 아팠던 선택이었을지 모르지만, 이로써 실향민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만포면옥의 평양냉면이 태어날 수 있었다.

아버지 지해성 대표, 어머니 진정옥 대표 모두 실향민이었으니 메뉴 선택은 당연한 결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당시 실향민이라고 해서 모두 평양냉면의 맛을 재현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머슴 여럿을 둘만 한, 꽤 유복한 가정에서만 평양냉면을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유압기로 메밀면을 내릴 수 있지만, 옛날에만 해도 모두 수작업이었대요. 나무틀에 구멍을 뚫고, 그 위로 반죽을 눌러서 면을 내렸는데, 힘이 보통 많이 드는 일이 아니죠. 면 내리는 틀에 사람이 매달려야 간신히 면이 나왔으니까요."

▲ 과거 만포면옥 가게 전경(사진=만포면옥) © 팝콘뉴스


그렇게 덕양구 동산동, 그 당시 동산리 허허벌판 시골 동네에 테이블을 세 개 놓고 무작정 장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장사를 시작하자마자 손님들이 밀려왔다. 그때만 해도 이북에서 내려온 실향민의 숫자가 많았으니, 우연히 만포면옥을 찾아왔던 이들은 고향 음식을 찾았다는 기쁨에 다른 실향민에게 이 맛을 알렸고, 소개받은 이들 역시 주변에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슬픔을 안은 이들을 데리고 만포면옥을 찾았다.

게다가 만포면옥에서 유명 영화배우들을 봤다는 소문도 자자했다. 영화계에 오래 몸담았던 아버지의 지인들이 그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박노식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배우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대한민국과 개인의 운명이 뒤얽히며 이어진 만포면옥


그렇게 3년 만에 만포면옥은 동산리에서 123 골프장 건너편 자리로 확장 이전했고, 커진 규모만큼 거물급 정치인들도 만포면옥을 찾기 시작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사단장 시절의 전두환은 물론, 박정희 대통령도 이곳에서 평양냉면을 먹곤 했다. 그때 당시 유류파동으로 많은 국민이 힘들었을 당시였기에 뉴스에는 만포면옥을 배경으로 한 비판 기사들이 쏟아졌다. '나라에 기름이 없는데, 고급 자가용을 타고 밥 먹으러 다니는 고위층'을 꼬집는 내용이었다. 비록 중심가에서는 조금은 거리가 떨어진 지역이었지만, 강남 개발 전까지 신흥부촌으로 떠오르던 은평구에 속한 만포면옥은 잘 사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찾아오는 곳이었다.

그런데 70년대 남북적십자회담으로 인해 통일로가 좁아서 차로를 확장하게 되면서 통일로 가에 있던 만포면옥도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1979년 만포면옥은 박석고개 가스 충전소 옆으로 그 자리를 옮긴다. 무려 2층 건물을 세 동이나 확장한 모습이었다.

"그때 직원만 해도 40명, 하루 판매하는 냉면만 해도 삼천 그릇이었죠. 솔직히 집값도 안 비쌌을 때였으니까 하루 매출로 집 한 채 값이 나온다고 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이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버지인 지해성 대표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그 큰 땅과 건물을 모두 날린 것. 그러자 다시 123골프장 건너편, 도로를 제외하고 그린벨트로 묶인 땅에 짓고, 다시 만포면옥을 이어가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 이곳에서 자리를 잡나 싶었지만, 8년 만에 이곳 역시 은평뉴타운으로 지정되면서 수용되었고, 현재의 자리 갈현동 큰길가로 옮겨왔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귀한 음식으로서 기억의 맛을 이어가도록


1972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것은 단순히 만포면옥이라는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그 당시의 전통적으로 국물을 내던 방식부터 음식을 대하는 자세까지 전부 같아야만 했다. 평양냉면은 차돌양지만을 써서 국물을 내고, 동치미 국물을 더해 간을 맞추고 감칠맛을 더했다. 녹두 지짐은 100% 녹두 갈아 반죽을 만들고, 배추, 양파, 고사리, 돼지고기 등의 소를 넣어 손님이 주문하면 즉석에서 만들어 손님상에 낸다.

셋째 아들이었던 지용석 대표는 1972년 개업 이후로 어렸을 때부터 녹두 반죽 담당이었다.

"제가 국민학교 2학년 시절에 아버지가 가게를 여셨는데, 그때부터 온 가족이 다 매달렸어요. 학교 갔다 와서 놀고 싶어도 맨날 일만 했죠. 지금은 기계로 갈지만, 그때는 맷돌로 녹두를 갈았어야 했는데, 제가 녹두 가는 담당이었어요."

▲ 만포면옥의 평양냉면(사진=만포면옥) © 팝콘뉴스


불만이 가득한 뚱한 얼굴로 맷돌을 안았지만, 한 번 안 하겠다고 뻗대지도 못했다. 뻗대봤자 어차피 자신이 하는 일이었고,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해오던 일이었지만, 그 역시 이 일 대신 다른 일을 꿈꿨다. 미국에서 대학 생활을 마치고, 미8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가업을 이어야 할 때가 오자 만포면옥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아무리 사회생활을 오래 경험했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고, 어머니에게 음식을 배우는 일만 3년이 걸렸다. 좋은 식재료를 고르고, 손질하고, 요리하고, 손님 입으로 들어가기까지 모든 과정이 그가 배워야 할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그도 비싼 차돌양지 대신 다른 소고기 부위를 쓰거나 돼지고기를 섞으면 그 국물 맛이 달라진다는 것을 수긍했고, 편하기 위해 녹두에 다른 반죽을 쓰면 맛을 버린다는 것을 인정했다. 평생을 먹어온 맛이니 그 차이가 느껴지면 자기 자신 역시도 견딜 수가 없어졌다.

이는 만포면옥을 찾아 수십 년 동안 방문을 해온 단골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70년대 군 생활을 삼성리에서 했던 청년은 이제 노신사가 되어 자식에 손자들 손을 잡고 이곳을 찾았다. '우리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와서 냉면을 먹였던 곳'이라며 손자들에게 옛날얘기를 전했다.

한번은 가게 마감 중 추레한 행색에, 거동도 불편해 보이고 옷에는 큼큼한 냄새가 가득 밴 노인이 들어와 무작정 냉면 한 그릇을 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를 본 진정옥 대표가 '어디서 많이 보시던 분'이라며 유심히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는 오랜 단골을 기억해냈다.

"예전에 고양군수셨던 분이었어요. 실향민이셨고, 저희 집 냉면을 참 좋아하셨어요. 다른 실향민들한테도 저희 평양냉면을 드시면서 '이게 고향 맛'이라고 항상 말씀하셨는데, 은퇴하시고 부천인가 인천인가로 이사를 하셨어요. 그런데 이런 모습으로 찾아오셨더라고요. 저희는 우선 가족분들에게 전화했죠. 알고 보니 그 집에서도 아침부터 아버지가 사라지셨으니까 난리가 났었대요.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게다가 뇌출혈에 풍까지 있으신 아버지가 아침부터 여기를 오시겠다고 걸어오신 거였죠."

▲ (현재 만포면옥의 모습(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이렇게 만포면옥은 실향민에게 있어서 단순히 음식 한 그릇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에 지용석 대표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거나 매장을 더 여는 대신 지금의 만포면옥에 집중할 계획이다.

"저도 물려받을 당시에는 솔직히 욕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작년에 직영점을 잠깐 운영해보니 알겠더라고요. 프랜차이즈는 물론 직영점도 맛을 똑같이 내기가 어려워요. 그러니 한 군데에서 기억의 맛대로 그대로 맛보여드리는 일에 열중해야죠."

음식의 유행은 때때로 너무도 쉽게 바뀐다. 이국적인 음식이 유행하거나 자극적인 음식이 유행할 때도 많다.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음식이 아니라 다시 추억을 맛보고 싶은 순간은 반드시 온다. 이미 지나버린 유행 때문에, 혹은 너무도 유명해져서 맛을 잃은 프랜차이즈 때문에 빛바랜 추억조차 느낄 수 없는 순간이 오게 될까 봐 가끔은 두렵다. 만포면옥처럼 추억을 귀하게 여겨주며 단골들의 마음을 다독이는 곳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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