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의 재탄생

오역 논란에 휩싸인 2018 한국 문학계

이강우 기자 | 입력 : 2018/06/11 [17:35]

(팝콘뉴스=이강우 기자) 한국 문화계의 오역 문제는 일회성 이슈가 아니다.

▲ '위대한 개츠비' F.스콧 피츠제럴드 저, 이정서 역, 2018년 5월 © 새움

 

특히 소설을 포함해 외국 문학 번역에 뿌리 깊은 오역과 의역 문제는, 학계와 출판, 언론계의 의도적 방관과 무지, 관행에 의해 번번이 무시돼 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번역가 이정서 씨가 20세기 영미문학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위대한 개츠비'의 새 번역을 통해, 고전문학 번역의 고질적 문제점을 다시 지적했다.


이정서 역자는 '이방인', '어린 왕자', '노인과 바다' 등 새 번역을 통해 우리 문학의 오역, 의역 문제를 수년 동안 지적해 왔다.


이제 그의 고전 번역은 '또 하나의 번역'이 아닌 '전혀 새로운 번역'으로 인정 받고 있다.


특히 이번에 새로 출간된 새움 세계문학전집의 '위대한 개츠비'는 세계 고전문학의 오역이 얼마나 심각한 폐해를 끼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준다.


독자들의 올바른 이해를 방해하는 것은 물론, 문학사적으로 인정 받은 원전의 가치까지 망가뜨리는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영미권에서 이 책, '위대한 개츠비'에 쏟아진 찬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또한 이 소설은 1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베스트셀러이면서 수시로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느끼는 감동은 사뭇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은 실제로 왜 제목이 '위대한 개츠비'일까라는 의문에서 시작했다.


'위대한 개츠비'는 제목 때문에도 영미권에서 상당한 이슈가 됐다.


원래 작가는 '웨스트 에그의 트리말키오'로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지니어스'라는 영화가 있다. 거기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위대한 개츠비'를 편집한 주인공 맥스 퍼킨스가 피츠제럴드에게 하는 말이다.


"당신이 서점 가판대 앞에 서 있다고 상상해 봐, '위대한 개츠비'와 '웨스트 에그의 트리말키오' 중 어떤 제목의 책을 고르겠어?"


그 사회에서  '위대한 개츠비' 제목이 이슈가 됐던 것은 오히려 저렇 듯 너무나 잘 지어져서 회자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읽고 왜 제목이  '위대한 개츠비'인지를 의아해 했다.


한마디로 번역서 내용으로는 절대 개츠비가 위대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냥 한 여자에 집착한 '위대한 사기꾼'처럼 보였다고나 할까?


그리하여 누군가 '왜 개츠비가 위대하다는 것이냐'고 물으면, 번역자나 평론가나 기자나, 영어를 좀 아는 누구나 모두, 한 여자에게만큼은 특별한 사랑을 했으니 위대한 것 아니냐고 상대를 가르치려 들거나, 반어적인 의미가 담긴 것이라고 아는 체를 해 왔던 것이다.


역자는 저러한 문답들이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 번역을 하게 됐다.


그건 바로 잘못된 번역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건 단지 한두 문장 틀려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전체 뉘앙스가 뒤틀려서 생긴 오해였던 것이다.


피츠제럴드가 이 작품에서 창조한 '개츠비'라는 인물은 그 순수성만으로 '위대하다'는 수식을 받아도 충분했던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숨고리까지 살린 섬세한 번역으로 우리 곁을 다시 찾은  '위대한 개츠비'는 왜곡된 개츠비 캐릭터에 본연의 순수성을 찾아준다.


예술적 순수성으로 그려낸 순수한 남자 이야기가 '위대한 개츠비'다.


새롭게 출간된 새움 세계문학전집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며 독자들은 그간 우리 사회에서 알고 있던 독특한 연애소설의 수준을 넘어서 작가가 의도한 '위대한 개츠비' 본연의 모습을 조망해 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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