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뉴스=홍선기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 분권제도 연구부장·법학박사·독일정치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예루살렘에는 알 아크사(Al Aqsa)라는 사원이 있다. 이 사원은 고대 유대인들의 성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7세기 이후 이 지역을 점령한 무슬림들은 이곳에서 마호메트가 승천했기 때문의 이슬람의 성지라며 대규모 사원을 건설했다. 이후 기독교인들도 예수가 인간을 위해 고난받은 장소라는 이유로 이곳을 자신들의 성지로 삼았다. 하지만 이 때문에 알 아크사 사원 부지는 유대교와 기독교 및 이슬람의 종교 갈등 지역이 되고 말았다. 한번은 유대인 출신의 예루살렘 시장이 이 사원을 문화재 보존 목적으로 보수공사를 하려 하자, 이를 믿지 않은 무슬림들이 시위를 펼쳐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비단 이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과 유대인 그리고 이슬람인들은 자신들의 성지 보존을 명목으로 수시로 언쟁과 물리적 충돌을 벌이고 있다. 많은 학자는 이곳을 종교적 세계의 화약고로 부른다. 실지로 거리엔 총을 들고 다니는 군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란 의미다.

안타깝게도 이와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지난 2022년 9월 주어사의 천주교 성지화 사업에 대응하기 위해 불교계는 송탁 스님과 수경 스님 및 동효 스님을 위주로 이전부터 활동하던 민학기 변호사, 대한불교청년회 및 교수불자연합회와 함께 천진암·주어사 답사·연구회를 조직했다.

경기도 광주시에 자리한 천진암과 여주의 주어사는 한국 천주교 최초의 강학지로, 이곳에서 정약용 형제와 이승훈이 이벽과 그의 스승인 권철신 등과 함께 모여 공부했다고 전해지는 장소이다. 이후 1801년 서학을 공부한 이들의 상당수와 이를 도운 승려들이 처형, 유배 및 고문 등으로 모진 고초를 겪게 되었다.

▲ 홍선기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 분권제도 연구부장·법학박사·독일정치경제연구소 연구위원 ©팝콘뉴스

천주교로서는 이곳이 천주교의 발상지라 할 수 있지만, 불교 관점에서는 정부의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인들을 숨겨주다 스님들은 처형당하고 사찰은 결국 폐사에 이르게 된 불교의 자비 정신과 화쟁 사상이 깃든 곳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천진암과 주어사의 불자들이 서학자들을 보살폈다는 이유로 수난을 겪었던 역사는 천주교가 불교계에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이런 불교의 역사적 배경과 가치를 배제하고, 천주교만의 성지로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에 불교계가 반발하고 있다. 이 사건의 본질은 천진암과 주어사 모두 사찰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주교는 이미 천진암을 성지로 삼아 큰 시설을 갖춰놨는데 주어사지까지 성지로 만들겠다 하여 갈등이 불거진 것이다.

한 장소의 역사적 의미는 다양하다. 따라서 역사성 있고 다양한 성격이 있던 장소를 한 가지 관점으로만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여러 종교의 역사적 경험이 서려 있는 장소는 특정 종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특정 종교의 성지가 되면 그 장소의 역사성은 단순화되고 배타성을 띠게 된다. 전봉준과 최시형과 같은 동학의 지도자들이 순교한 서소문 공원은 천도교의 성지로 불리지만 정작 천주교의 성지가 되면서 천도교의 역사가 배제되고 공간도 천주교인들만의 장소로 단순화되고 말았다. 천주교가 천진암을 성지화하면서 역시 같은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고대 찬란한 문명을 가졌던 로마 시대 이후로 유럽은 몇백 년간 중세 암흑기로 빠져들어 갔다. 단일 종교가 사상의 지배 수단이 되어 다른 가치와 다른 제도를 허락하지 않는 전체주의 단면 때문이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테러와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종교 간 갈등이 적은 나라로 평가받는다. 미국 국무부에는 종교자유사무국이 있는데 여기서는 1998년부터 관련법에 따라 미국 의회에 세계 각국의 종교의 자유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고 공표한다. 2010년 미국 국무부는 다종교 국가임에도 종교 간 큰 분쟁이 없는 국가의 대표적인 곳으로 한국을 지목하고, 한국 사례를 연구하기 위해 당시 알렉산더 매클래런 국장이 한국을 찾아 문화체육관광부 종무관을 비롯한 종교 관계자들을 만나 종교 갈등의 해법을 구한 적이 있었다. 매클래런 국장은 신도 수가 1000만 명을 넘는 불교와 개신교를 비롯한 7대 종단 외에 다양한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이유를 집중적으로 물었고, 당시 우리의 답은 "기독교, 불교, 천주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민족종교 등 7대 종단의 소통과 화합의 결과"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10년 전보다 후퇴한 것은 아닌가?

'크리스천 포스트'에 따르면 영국 성공회와 이스라엘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한자리에 모여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종교 성지(holy site)를 함께 보존하고 관리할 것을 결의했고, 세계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이 같은 운동에 함께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종교 유적지에 대해 보다 깊은 관심을 촉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주어사도 단순히 천주교의 성지로만 볼 것이 아니라 불교의 자비 정신을 바탕으로 천주교가 태동할 수 있었다는 종교화합의 장소로 보는 것이 역사적 상징성에 부합하지 않은가? 주어사를 종교평화와 공존의 상징으로 삼게 된다면 오히려 세계적인 명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미국 국무부 종교자유사무국이 다시 한국을 찾게 된다면 가장 먼저 공동성지가 된 주어사를 찾지 않을까? 그러면 한국의 종교화합 장소만이 아닌 세계가 주목하는 모범적인 종교화합의 상징일 될 수 있지 않을까?

종교학자인 한승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학술 세미나에서 "종교사적으로 봤을 때 주어사와 천진암은 결코 특정한 제도종교가 독점할 수 없는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며 "주어사와 천진암에서 일어난 일은 불교적인 장소에 유교인의 정체성을 가진 행위자들이 모여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건이기 때문에 이 장소는 한국종교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종교 전통 사이의 교류가 새로운 종교사적 도약을 이뤄낸 종교화합의 현장으로서 기억돼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면서 한국종교의 공공성지화를 주장했다.

불교계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분위기이다. 도법 스님은 "주어사에서 유교, 불교, 천주교가 만났을 때 당시의 시대정신이 있었다"며 불교와 천주교의 공동성지화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천진암·주어사 답사·연구회의 송탁 스님, 동현 스님, 수경 스님도 공존형 종교성지 조성을 통해 불교나 천주교의 일방적 기억만을 강요하는 장소가 아니라 모두 함께 종교‧문화적 공감대를 이루는 공공성지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제 공은 천주교로 넘어간 셈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9년 태국 방문 때 대형 불상 앞에서 불교 지도자와 마주 앉아 불교의 포용성에 존경의 뜻을 나타낸 바 있다. 진정한 가톨릭 정신을 보여준 셈이다. 문득 법정 스님과 이해인 수녀님의 30년 넘는 인연이 떠오른다. 법정 스님과 이해인 수녀님은 서로 주고받은 편지 속에서 신앙이란 편 가르기가 아니고 가장 옳고 바르며,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것임을 알렸다. 이번 주어사 사건을 보면서 두 분이 생각난다.[팝콘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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