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공산당의 극단성이 한국 사회를 갈등의 극단성으로 밀어 넣어

▲ 파리로 입성하는 연합군(사진=픽사베이) © 팝콘뉴스


(팝콘뉴스=김재용 기자)한국은 1990년대 민주화 이후 해방 전후사 인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민주화 이후 남한의 우익 진영과 일제 친일파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강화되었고 좌익 진영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즉, 해방 이후의 정치적 혼란은 전적으로 부패한 우익 진영과 친일파 때문이었고, 상대적으로 좌익들은 진정으로 민중을 위한 애국자들이 많았다는 관점이다.

해방 후의 혼란을 어느 한쪽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분명히 친일파들과 부패한 우익에 의해 혼란했던 점도 있었지만, 소련군과 북한, 남한 좌익의 과도한 극단성이 우익, 민중과의 갈등을 초래했음을 인식해야 한다.

소련의 교활한 북한 점령

일제의 패망을 분명히 예견했을 소련은 일제 패망을 며칠 남기지 않은 8월 8일에 대일 선전포고를 한 후 총 150만 명의 병력과 대량의 무기를 대일 전쟁에 투입했다. 8월 15일 소련은 북한에 군대를 주둔하게 되었다. 소련 참전 기간은 불과 6일에 불과했으나 연합국이라는 명분으로 북한에서 점령군 행세를 한 것이다.

소련은 8월 28일까지 총병력 12만 5천 명을 북한 지역에 배치했다. 8월 26일부터 북위 38도선을 공식적으로 봉쇄하면서 남과 북을 잇는 경의선, 전화 통신, 사람과 물자의 왕래 등 모든 것을 다 끊었다. 8월 어느 날, 소련군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에게 스탈린은 소련의 뜻에 맞게 북한을 이끌어갈 조선인 지도자를 추천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바실레프스키는 극동군 산하 88 특별 여단 소속의 대위 김일성을 추천했다. 9월 스탈린은 김일성을 면접하고 '합격' 판정을 내렸다.

소련군의 강간과 약탈

소련군은 북한에서 약탈행위를 했고 이를 피해 남한으로 월남한 많은 사람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은 폭력과 강제였다. 북한 전문가 김학준 교수는 북한 점령을 맡은 제25군은 중앙아시아의 감옥에서 풀어낸 징집한 죄수 출신 사병들이 많았다고 했다. '전환기의 내막'의 저자 양명문은 책에서 소련군에 관해 "우리들의 신경으로는 당해낼 수 없을 만큼 추잡하고 우악스러웠다"고 말했다. 소련군에 대한 추잡한 인식을 지니고 있던 월남민 중에 극단적인 반공인사가 많은 것은 그래서 어쩌면 당연한 일로 봐야 한다.

당시 북한에서 교사였던 함삼식은 이렇게 증언했다. "만나자마자 악수하자고 청해 놓고 손목에 시계라도 차고 있으면 '다와이'라고 말했어요. 소련 말로 '내놓으라'는 뜻이죠. 당시에 그렇게 빼앗을 걸로 팔뚝에 시계 몇 개씩 차고 다니는 놈들이 많았어요. 만년필 꽂고 다니는 것도 눈에 띄면 뺏어갔어요. 게다가 따발총을 어깨에 멘 채 위압감까지 주니 점점 좋았던 인상이 사라지게 되죠." 소련군은 특히 시계를 좋아해 평양 거리에는 팔에 시계를 네댓 개씩 차고 다니는 소련 병사들이 수두룩했다고 한다.

당시의 기록은 더 심각하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문화과학대학의 김학준 교수가 쓴 책 '북한 50년사'에 따르면 "일본 여자들의 경우 대낮에도 강간당했다. 그래서 상당수 일본 여자들은 아예 머리카락을 완전히 깎고 얼굴에 숯검정을 바른 채 남장을 해야 했다. 마침내는 야밤에 조선 여자들도 당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평양 주민들은 집 대문에 대야를 걸어 놓고 근처에 소련 병정들이 나타났다 하면 대야를 두들겨 이웃들에게 알려 주면서 공동 대처했다. 소련군 사령부는 병사들의 행패를 모르는 체했다. 그뿐 아니라, 이제는 병사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점령군 조직 차원에서 북한을 경제적으로 착취하기 시작했다. 2차 대전의 손실을 메운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공장을 비롯해 산업 시설물들을 마구 뜯어갔다"고 한다.

미국의 저명한 한국전쟁 연구자 브루스 커밍스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일인과 한인들에게 강간과 약탈을 포함한 파괴 행위를 저질렀는데 그것은 아주 광범위했다"고 말했다. 이를 경험한 후 월남한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극도로 혐오했고 그것이 남한 사회의 반공 문화를 강화하는 데 기여한 점도 부정할 순 없는 것이다.

남한 좌익의 극단성

남한은 어땠을까? 해방 직후 여운형이 창설한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는 그 애초 취지와는 다르게 조선공산당 박헌영파의 영향력이 점점 강화됐다. 건준의 애초 취지는 좌우익을 구분하지 않고 조선 민중의 질서 안정을 위한 것이었으나 박헌영파는 건준을 공산주의 조직으로 점점 이끌어갔다. 결국 많은 민족주의자가 건준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건준은 완전히 좌경화되고 말았다. 여운형의 측근들이 여운형에게 "건준의 핵심은 다 떼버리고 박헌영의 공산당 계열이 주동이 되었는즉, 건준을 어디로 끌고 가자는 것인가"라고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타협과 협상을 통해서 좌우가 아우르는 건강한 조직 구성보다는 자신들이 모든 것을 점령하는 것 이외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정치학과 명예교수 이정식은 해방 후 남한에서 좌우 대립이 격화된 주요 원인은 조선공산당의 미숙성과 급진성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좌익이나 우익 모두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독선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도 문제였지만 좌익이 우익보다 더 월등하게 우세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조선공산당의 체질이 더 문제였다"고 밝혔다.

2022년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쪽이 자기들의 이념만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갈 때 타협과 평화는 깨지고 갈등과 혼란만 초래하게 된다.

참고도서

<전환기의 내막> 양명문, 조선일보사, 1982,

<북한 50년사> 김학준, 동아출판사, 1995,

<한국전쟁의 기원> 부르스 커밍스, 일월서각, 1986.

<대한민국의 기원> 이정식, 일조각, 2006.[팝콘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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