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이들에게 진심어린 따뜻한 말로 용기를 전하고 싶은, 거제수협 김창휘 주임

▲ (사진=김창휘 본인 제공) © 팝콘뉴스


(팝콘뉴스=김보연 기자) * [talk! talk! 튀는 인생] 코너는 평범(平凡)함과 비범(非凡)함이 공존하고, 톡톡 튀는 자신만의 개성으로 현시대를 뜀박질하는 청년과의 대화를 의미한다.


꿈과 다른 길 가다


찬바람이 가슴까지 시리게 만들던 어느 겨울날, 전화기 넘어 들리는 거제수협 김창휘 주임의 목소리는 모진 풍파를 겪은 사람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상냥하고 차분했다. 1983년생인 김 주임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 일찍이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어릴 적부터 사회복지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서울의 유명한 복지센터에서 근무했다. 당시엔 더 발전된 사회복지를 위해 일본 유학을 결심, 박사 과정 이수를 목표로 열심히 달렸다"라며 "그러던 중 많은 업무에 휴식을 취할 겸 고향인 거제도로 오게 됐다"라고 회상했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 시기가 김창휘 주임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일까. "우연히 둘러본 거리에서 수협 건물에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다"는 김 주임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2009년 수협에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앞만 보며 일하던 2014년에 결혼해 행복한 가정도 꾸렸다"라며 "모든 게 더할 나위 없이 순조로웠다"고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여느 직장인과 다름없는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던 그에게 돌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 투병 당시 모습 (사진=김창휘 본인 제공) © 팝콘뉴스


예기치 못한 고통


외향적이면서도 내향적인 김창휘 주임은 축구와 헬스 등 운동을 즐기던 사람이었으나, 어느 날부터 이유 없는 피로감을 느낀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한 채 식욕저하까지 겹치게 된다. 퇴근 후 누울 자리만 보이고, 취침 시 식은땀으로 이불과 베개가 흥건하다. 오후 7시경부터 열이 39℃까지 올라가고 나서야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김 주임은 지방 병원을 전전, 의사의 진통제 처방으로 근근이 버티다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편도가 풍선처럼 부풀고 코피가 멈추지 않았다. 서혜부까지 부어 걷는 것조차 무리였다"는 그는 "부산 소재의 갑상선 전문병원을 거쳐 대학병원으로 가게 됐다. 혈액 검사 후 의료진들이 백혈병이 의심된다고 치료를 서둘렀다. 가슴에 구멍을 뚫어 항암제를 투약했다. 혈액 수치가 너무 낮아 수혈도 받았다. 수혈 중에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서울 소재 대학병원을 권했다. 수혈 링거를 꽂은 채로 서울로 갔다"라며 얕은 한숨을 토해냈다.

부산 소재 대학병원에서 이미 골수 검사를 마친 상태였던 김창휘 주임은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도 골수 검사를 비롯한 힘겨운 검사를 이어나갔다. 검사 결과는 림프구성 백혈병이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김 주임은 "너무 황당해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라며 "억울함도 잠시, 갑자기 자신감이 넘쳤다. '생존률 20%? 내가 꼭 그 20% 안에 들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내 자신에게 하는 선전포고와도 같았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하지만 1차 항암치료 후 공포감이 엄습해왔다. 1차 항암치료 30일을 받으면 30일 동안 퇴원이다. 2차 항암을 위해선 체력이 보장돼야 해 금지사항이 많지만, 어떻게 죽으나 똑같단 생각으로 가족과 제주도로 향했다"라고 짐짓 강한 어조를 보였다.

▲ (사진=김창휘 본인 제공) © 팝콘뉴스


무너진 정신력, 운동으로 극복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덕이었을까. 그는 조금씩 희망을 찾아간다. "처음엔 죽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투병 과정을 모두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블로그를 시작했다"는 김창휘 주임은 "백혈병 판정 때 3세, 100일이었던 아이들에게 아빠가 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라며 "2차, 3차 항암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22일 차에 퇴원이 결정됐다. 감사하게 공여자를 찾아 골수 이식이 정해졌다"고 밝혔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게 김 주임은 갑자기 하체 마비와 동시에 섬망 증세를 보인다. "전신에 패혈증이 오고 저혈당 쇼크까지 왔다. 전신에 퍼져 온통 멍투성이였다"는 그는 "병원에서 가망이 없다는 말에 가족, 친구들에게 유언이 아닌 유언을 전하며 이별 준비를 했다. 이왕 죽을 것이라면 먹고 싶은 거라도 먹자는 생각에 피자, 치킨 등을 한 조각씩 먹었다"라며 "이상하게 컨디션이 조금씩 좋아졌다. 의사에게 말해 골수 이식 수술이 가능한 몸이 돼서 오겠다고 퇴원 요청을 했다"고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김창휘 주임은 이어 "2018년 3월 백혈병 판정을 받고 같은 해 9월 28일 골수 이식 수술을 하게 됐다. 하지만 골수 이식이 끝이 아니다. 골수 이식 후 찾아오는 숙주로 인해 유명을 달리하는 암 환우들이 많다"며 "나 역시 폐 숙주가 심각해 후각 장애 등 많은 후유증이 왔다. 갖은 노력 끝에 상태가 조금씩 호전됐지만, 골수 이식 1년 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집에서 가만히 있으니 더 미칠 것 같아서 자전거를 타고 헬스도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모두가 말리던 자전거를 타고 난 후, 절반가량 떨어진 폐기능이 90%까지 올라가게 됐다. "호흡기내과 교수까지 논문을 쓰고 싶다고 할 정도로 놀라운 결과라고 말했다"는 김 주임은 "그렇게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던 중, 대상포진이 왔다. 큰 고비였다. 정신력이 무너져 깊은 좌절감을 겪었다"라고 털어놨다. 이어 "이대로는 안 되겠단 생각으로 다시 헬스장을 찾았다. 운동으로 많은 것을 극복했다. 아울러 내 블로그를 보고 응원과 위로는 받는 암 환우들에게 책임감을 느껴 운동을 멈출 수가 없게 됐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굳건함이 느껴졌다.

▲ (사진=김창휘 본인 제공) © 팝콘뉴스


베푸는 삶 지향


"백혈병 발병 전의 김창휘도 김창휘고, 후의 김창휘도 김창휘"라는 김창휘 주임은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사람이다.

김 주임은 "사회복지의 꿈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다. 기회가 된다면, 암 환우들뿐 아니라 힘겨움에 처한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전하고,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라며 "또한 암 환우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책을 펴내고 싶다. 힘겨운 이들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를 알리고 싶다"고 포부를 드러냈다.

아직 완치 판정이 난 건 아니나, 큰 병을 슬기롭게 잘 극복하고 아이들에게 슈퍼맨이 되고 싶다는 그. 함께 이겨내 준 가족과 지인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김창휘 주임, 피트니스 대회 출전으로 암 환우들에게 힘을 주고 싶다는 김 주임, 그에게 열렬한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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