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눈과 귀를 자극하는 사회의 수많은 물질적 억압에 놓여 있는 현대인
소유하고 있는 것은 언제라도 잃을 수 있는 것, 정신적으로 충만한 존재적 인간이 되어야

▲ (사진=픽사베이) © 팝콘뉴스


(팝콘뉴스=김재용 기자)한국에도 웰빙 열풍이 불어서 치유의 인문학이라는 류의 책들이 잘 팔리는 시대가 됐다. 사람들은 삶에서 직면하는 고통, 분노, 두려움을 치유하고 위로받기 위해서 심리를 위로해주는 심리학책을 서점에서 집어 든다. 서점 베스트셀러 랭킹에는 항상 이런 책들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심리학 교양서나 자기계발서의 요점은 결국 한가지로 모인다. '주체적으로 살아라', '남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지 말고 내면에 의지하라', '과도한 소유욕의 욕망을 끊어라' 표현만 거창하게 했을 뿐 결국 다 이런 내용들이 핵심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책들이 많이 팔리고 있음에도 강남의 성형외과는 더욱더 번창하고, 물질주의적 가치는 더욱더 팽배해지고, 이기적 성취욕을 향한 사람들의 욕망은 더욱더 가열된다. 비주체적인 욕망의 바벨탑을 향한 뜨거운 열기는 당최 사라지지 않는다. 치유의 심리학이 강조하는 내용과는 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개인이 아무리 책 속에서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지 말고 나만의 자아를 확립하라"는 내용을 읽고 심리적 성장의 자양분을 얻었다 해도, 책장을 덮고 당장 밖으로 나가면 주체적으로 살 수 없게 만드는 온갖 사회적 억압들이 내리누른다. 즉, 개인만의 주체성은 사회의 물리적 억압들로 인해서 결코 버틸 수가 없다. 버틸 수 없다고 개인의 나약함만을 탓할 수는 없다. 현대 산업자본주의 속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개개인은 산업자본주의가 이끄는 거대한 욕망의 파도에 휩쓸려버리니 아무리 치유의 심리학책을 읽은들 이 거대한 힘 앞에서 속절없이 무력해지는 것이다.

개인의 심리 치유와 현실적 불평등의 충돌

심리적 치유를 위한 자아의 확립이라는 것은 사회의 물적 토대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 개인의 내적 성장은 사회적 환경들과 결코 동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내적 자아의 확립은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불평등과 부조리 문제와 불일치하면서 극도의 충돌을 겪는다.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심리적 문제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울대를 기준으로 꼴찌까지 수능점수로 서열화되는 전근대적 성격의 학벌사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경제적 어려움과 빈부격차, 직장에나 사회에서 나만의 생각과 창의성을 제대로 발현하지 못하게 하고, 집단의 정서를 따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집단주의 문화. 돈이 없고 서열이 낮고, 외모가 예쁘지 않다고 나에게 모멸감을 주는 사람들. 이런 실제적 억압 속에서 심리 교양서적 하나 읽고 갑자기 자아를 해방할 수는 없다.

비록 여러 가지 사정으로 대학은 나오지 않았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서울대 출신 못지않게 능력을 인정해주는 사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여러 가지 사회적 복지와 지지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고, 내 꿈을 펼칠 수 있는 사회. 나만의 개성과 창의성을 마음껏 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학교와 직장 분위기. 돈이 없고 서열이 낮고 성형수술을 하지 않아도 나를 모멸하지 않고 나의 인격 자체를 존중해주는 사람들. 심리적 치유란 이러한 열린사회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내가 책을 통해서 자기 성숙을 이룬 다음에 사회에 나간 후 심리적 성숙을 지탱해주는 사회 분위기가 있을 때 그것을 발판으로 자신의 심리상태를 더욱 발전시키며 성숙해질 수 있다. 반면에, 내가 혼자서 책을 보고 아무리 성숙을 이뤘다고 해도, 당장 사회에 나간 후 사회의 물적 토대가 나에게 하는 것이라고는 그 성숙에 칼을 대고, 내리누르고 난도질하는 것이라면 그 성숙은 얼마 못 가서 다시 반납해야 한다.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갈수록 이상 성격 장애를 지닌 사람이 많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는 서구선진국에 비하면 여러 가지로 여전히 닫힌사회다. 이런 닫힌사회에서 심리적 성숙을 이룬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전근대적 사회 질서를 끊임없이 개혁하고 열린사회를 만들어 사회의 물적 토대를 합리적으로 만들어 놓아야 개인의 심리적 성숙도 자연스럽게 이룰 수 있다. 그래야 궁극적으로 돈벌이를 목적으로 유행하는 산업용 웰빙의 소비자가 되는 게 아니라 진정한 웰빙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심리치유적인 측면에서, 마르크스 같은 혁명사상은 여전히 사유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 한국 사회는 사회의 물적 토대가 바뀌어야 하는데 마르크스 유물론은 사회의 물적 토대가 인간의 내면을 결정한다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후에 이것이 프랑크푸르트학파들, 특히 마르쿠제 같은 사상가에 의해서 마르크스 사상은 기계적 유물론이라고 격렬한 비판을 받긴 했지만, 설사 기계적 유물론일지라도 그 핵심 사상의 가치는 여전히 사유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마르크스를 버려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왜냐하면 사회의 물적 토대라는 게 바뀌려면 혁명적인 상황이 발생해야 하는데 사회적 시스템이 공고화되어 있는 현대 사회에서 혁명이 발생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사회적 혁명을 구상하는 것은 몽상에 가깝다. 또한 사회적 혁명에만 집착하면 개인적 성품의 문제는 등한시하는 또 다른 전체주의 사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의 불균형한 물적 토대에 저항하기 위해서 개인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건강한 심리상태를 갖추는 일이다.

소유적 삶이냐 존재적 삶이냐

미국 신프로이트학파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은 이미 고전이 된 자신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건강한 심리상태를 갖추기 위해서 소유적 실존양식이 아니라 존재적 실존양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소유적 실존양식은 곧 뭐든지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사랑을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데이트 폭력이 발생하고, 길거리에 피어 있는 꽃을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꽃을 꺽는다. 그럼으로써 소유적 인간은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고 꽃의 생명을 단절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하지만 존재적 실존양식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이다. 사랑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존중하며 아프지 않게 하고, 꽃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꺾지 않고 그냥 보면서 꽃의 생명을 단절시키지 않는다.

"소유적 인간은 온갖 손실에 대해 끊임없는 걱정에 싸여 살며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린다.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에 떠밀려서 방어적으로 되며 가혹해지고 의심이 많아지고, 결국 외로워진다." 사랑을 꼭 손에 쥐려고 하므로 사랑을 파괴하고, 존재적 인간은 사랑을 파괴하지 않고, 꽃과 일체가 되고 결합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꽃의 생명을 건드리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존재적 실존양식을 가졌을 때 거대한 산업자본주의 물결 속에서 나를 잃지 않고 건강한 심리상태를 지닐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에 소유적 실존양식을 지니게 되면 주체할 수 없는 소유욕으로 인간은 고통과 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참고도서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차경아(옮긴이), 까치 2020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황문수, 문예출판사 2019

논문: 에리히 프롬의 인간관 :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서』, 박찬국, 시대와 철학 7권2호, 129-163(35pages),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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