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되면 남한산성에 올라 병자호란을 생각한다
성리학적 명분론이 도그마가 되어 비극 초래한 조선의 모습

▲ 영화 '남한산성' 스틸(사진=CJ ENM) © 팝콘뉴스


(팝콘뉴스=김재용 기자)12월이 오면 우리에겐 잊지 못할 역사가 있다. 바로 병자호란이다. 1636년 12월 8일에 청나라 군대가 국경을 넘으면서 발발한 병자호란은 불과 40여 일 만에 끝난 전쟁임에도 조선 국왕이 청 태종에게 항복함으로써 패배한 전쟁이기에 조선인의 정신적 피해가 큰 전쟁으로 기록된다.

병자호란하면 바로 남한산성이 생각난다. 청나라가 침략해 오자 며칠 안 돼 인조는 곧장 남한산성으로 도망가서 은거했다. 그곳에서 조정은 척화냐 주화냐 논쟁하다가 결국 항복 선언을 하면서 드디어 남한산성에서 나왔다. 조정이 주화론이냐 척화론이냐로 갈라져서 논쟁한 것을 보면 민중들을 걱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당시 기록물을 보면 지배층은 민중의 안위보다는 왕실의 보존과 지배층 자신들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전쟁 이후 청나라로 끌려갔던 민중들의 처리 여부를 살펴보면 이 점이 더 분명해진다. 왕실과 조정은 진심으로 민중을 걱정해서 주화론으로 전쟁을 끝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그동안 병자호란 이야기를 보면 주로 지배층의 입장과 국가주의적 측면에서 보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오늘은 온전하게 민중의 관점에서 병자호란에 관한 기록을 한번 살펴보자. 당시 지배층이 아닌 비교적 민중의 관점에서 기록된 대표적인 기록물은 '병자일록'이다. 병자일록은 당시 사옹원 봉사라는 하위직 직급으로 인조를 호종하며 남한산성의 최전선에서 방어 임무를 맡았던 하급관리 남급(南礏)의 일기이다. 남급은 최전방에서 직접 군사 임무를 맡았기에 자신의 주변을 자세히 돌아볼 수 있었다. 고위직 관료들이 보고서만 보고 기록한 기록물과는 다른 것이다. 병자일록에는 남한산성에서의 방어가 길어지면서 굶주림과 추위와 싸워야 했던 군사들의 일상이 적나라하게 기록돼 있다. 전란 중에 고통받는 민중들의 고난상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기록물이다.

12월 30일. 성첩에 올랐다. 성에 들어온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19일간이고, 포위당한 지는 15일간이다. 성안에 온갖 물건들이 궁색한데, 공급이 끊어져 전혀 없는 것은 땔감과 풀이었으니, 소와 말이 죄다 죽어가고 살아 있는 것도 굶주림이 극심한 나머지 서로 꼬리를 뜯어 먹었다.

1월 15일. 지난겨울과 봄을 거치는 이래로 이러한 한기의 매서움을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다. 하물며 이 남한산의 높은 꼭대기는 한여름에도 추웠다. 그러므로 초겨울에 온 눈이 아직도 녹지 않았는데 장수와 모든 군사는 시종일관 한데서 지내서 얼굴빛이 검푸르러 사람 같지 않았던데다 살이 터지고 손가락마저 빠져서 참담하기가 차마 말할 수 없었으며, 굶주린 말들은 거의 다 얼어 죽었다. 밤에 바람이 크게 불고 몹시 추웠는데 얼어 죽은 자가 9명이었다.

포위된 남한산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참혹해져 갔다. 풀조차 없어서 소와 말이 굶어 죽고, 군사들은 얼어 죽었다. 굶주림과 추위와 싸우면서 죽어가는 처지에 이르자 도망가는 군사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산성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상실되면서 그 수는 점점 더 늘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조정은 도망가는 군사들을 즉결 처형하고, 고위 관료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다녔다. 인조는 도망가는 군사의 목을 벤 장교에게 상을 주고, 척화를 주장하는 고위 관료인 윤집(尹集)이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자 사람들이 욕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전쟁에서 승리하든 패배하든 그 참혹한 대가는 민중이 지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이유로든 전쟁은 그 자체로 발발하지 말아야 한다. 공허한 명분론에 집착해서 전쟁을 초래한 인조와 당시 조정의 무능은 지금도 우리가 곱씹어 봐야 한다.

▲ 남한산성 동문의 모습(사진=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 팝콘뉴스


아무튼, 인조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났다. 인조는 자신이 항복함으로써 왕실이 보존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지만, 사실 민중의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됐다.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는 동안 수도권 지역에서는 청군에 의해서 무지막지한 인간사냥이 자행됐다. 청나라는 북방 유목인이 세운 나라다. 북방 유목인은 예로부터 인간사냥을 통해서 경제 활동을 영위했다. 이를 침략 경제라고 하는데 자연환경이 척박한 북방 지역에서는 다른 부족을 침략해서 생활물품과 인력을 빼앗아 생활을 영위해야 했다. 그런 습성이 국가 전략으로 확장되어 조선을 침략할 때도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이렇게 청군에게 잡혀간 민간인을 피로인이라고 한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게 끌려간 피로인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하게 모른다. 다만 전쟁이 끝난 뒤 최명길이 명나라 도독 진홍범에게 보낸 자문에서 피로인의 수를 50만 명으로 추정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 정도까지는 아닐 것으로 보지만 최소 몇십만 명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조선 인구가 1000만 명 남짓이던 시절에 몇십만 명은 엄청난 숫자인 것은 분명하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피로인들의 처지는 비참했다. 피로인의 송환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예조좌랑 허박은 "피로인이 되면서 겪는 고통은 죽음보다 더 심하고, 그것이 화기를 해치는 것 또한 죽음보다 더 심하다"고 말했다. 심양에서 끌려가는 과정에서, 심양에 도착한 이후, 탈출이나 속환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또 조선으로 귀환한 이후에도 고통은 계속됐다. 병자록을 지은 문신 나만갑(羅萬甲)은 당시의 청군 진영에 억류된 피로인들의 참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적진 가운데 조선인 피로인이 절반인데, 그들이 무엇인가를 호소하려 하면 청군이 철퇴로 때려죽인다. 참혹한 진상을 차마 볼 수가 없다."

청군은 전쟁에 쓰려고 남자들을 많이 잡아갔다. 이들은 청나라의 또 다른 전쟁에 끌려가 죽음을 맞이했다. 또한 젊은 여자는 닥치는 대로 끌고 갔다. 당시 사로잡힌 여자들 가운데 아이를 데리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청군은 이들 여자들을 끌고 가면서 아이들을 죽이거나 버리고 가는 만행이 심했다고 한다. 당시 작자 미상의 '강도록(江都錄)'에 보면 "포개진 시신들 사이로 젖먹이들이 어미를 찾아 기어다니며 울고 있다"고 처참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청군은 피로인들을 대상으로 소위 노예장사를 했는데, 조선에서 피로인 가족을 송환해 가려면 거금을 주고 데려가야 했다. 그 금액은 당시 집 한 채 값도 넘는 거금이었다고 했으니 일반 민중들은 가족을 데려오는 것을 꿈도 못 꾸었다. 피로인들을 데려오는 것도 높은 관직에 있거나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들만의 일이었다. 조선 조정의 외교적 무능이 총체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렇게 거금을 주고서 데려오는 과정 자체도 많은 난관을 겪어야 했는데 데려와서도 화냥년이라고 해서 남편들이 이혼을 요구하는 사례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오랑캐에 몸을 뺏겼으니 더럽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대부 집안들은 청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며느리들을 내쳤고 새로운 며느리를 맞이했다. 최명길은 이런 사대부의 행태를 비판했고, 인조실록에서는 그의 발언을 이렇게 비판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포로가 된 부녀자들은 비록 본심은 아니었을지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결국 절개를 잃은 것이다. 그러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하여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순 없는 것이다."

남자들의 무능과 실책으로 전쟁을 초래해서 아녀자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이제 와서 절개를 잃었다며 버리는 무책임한 모습이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모든 사상은 도그마(독단적 신념)가 되었을 때 더 이상 사회를 지탱해주는 가치가 아니라 지배층의 통치 수단이 되어서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병자호란을 통해서 성리학적 명분론이 도그마가 되어 민중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던 당시 모습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떤 정권이든 자기들의 집권 명분으로 '적폐 청산'이니 '사람이 우선'이니 하는 도덕적 명분론을 내세우고 그것을 이데올로기화했을 때 우리는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들이 내세우는 '사람' 속에는 '그들만'이 있고 민중은 없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한명기, 『병자호란 1,2』. 푸른역사 2013

논문: 『남한산성 扈從臣의 병자호란 기억』, 장경남, 민족문학사연구, 0(51), pp.230-256 Apr,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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