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CEO는 노동자 임금의 100배 이상인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경제적 자유 확보하려면 좋은 일자리 많아야

▲ (사진=픽사베이) © 팝콘뉴스


(팝콘뉴스=김재용 기자)아는 사람 중에 작년에 대학을 졸업한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아직 정규직으로 취직을 못 했는데 임시직으로 패스트푸드 체인점에 취직했다가 한 달도 못 하고 쫓겨났다. 일을 못한다고 하더란다. 이 친구 부모님은 그 모습을 보고 사회생활도 제대로 못한다며 핀잔을 주었단다. 그런데 나는 그 친구에게 핀잔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우리 사회가 노동에 대한 건전성이 얼마나 있는 사회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글로벌 기업인 그 패스트푸드 체인점이 유지되는 기반은 저임금 임시직 노동자들이다. 제아무리 글로벌 기업이라고 해도 주문받고 햄버거를 만들어서 고객에게 제공하는 노동자들이 없으면 단 하루도 운영할 수 없다. 그런데 그 글로벌 기업의 대표는 연봉이 노동자의 100배라는데 정작 임시직 노동자들의 임금은 한 달에 100만 원도 채 안 된다. 그 친구는 "이 돈은 한 달 동안 겨우 연명하기에도 빠듯한 액수"라고 했다. 만약 임금이 높았다면 그 친구는 일을 더욱 잘했을 것이다.

세계적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에 관해서 "노동 혹은 노동의 산물은 영속성이 없다"고 봤다. 반면 작업과 행위는 영속성·지속성이 있다. "작업과 행위 활동을 수행하는 것은 잠재적인 불멸성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좋은 삶"이라고 했다. 고대 그리스나 우리 조선시대에서 노동은 노예가 하는 것이었다. 노예는 당연히 자유인이 아니었다. 반면 제작자나 장인은 자유인이었다. 보다 고차적인 자유의 가능성은 고차원적인 행위(영속성)에서 이루어진다. 기업의 운영자는 영속성이 있는 제작자다. 그래서 그는 엄청난 액수의 연봉을 받는다. 그러나 햄버거를 만들고 제공하는 노동은 고대에는 노예들이 하던 영속성 없는 노동, 소모적인 노동에 불과하다. 나는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영속 없는 단순노동은 장기적으로 너를 소모하는 노예 노동에 불과하다. 영속성 있는 직업을 얻을 수 있도록 차라리 그 시간에 전공 공부를 하거나, 자격증 공부를 해라."

내가 이렇게 냉소적으로 말을 해준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노동의 건전성은 이미 상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극심한 빈부격차 사회를 지탱하는 노예가 되지 말라는 뜻이었다. 요새 몇 평 안 되는 원룸 월세만 70만 원~100만 원 하는 시대인데, 아무리 임시직이라지만 한 달 동안 고생해서 겨우 100만 원의 돈을 월급이라고 받는다는 건 다소 공허하다. 정규직 취직은 기약이 없고 저임금의 임시직 노동으로 미래를 꿈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동의 건전성이 상실한 시대에 사람들은 도박과 부동산 투자에 몰입한다. 이전 정권에서도 이슈가 됐던 '88만 원 세대'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올해 3월경에 미국의 어느 마사지 업소에서 화재가 발생해 일하던 마사지사 몇 명이 숨진 사고가 있었다. 이 업소는 태국인을 주로 고용하던 업소라고 했다. 그런데 숨진 직원들 중 태국인과 더불어 한국인이 몇 명 있었다. 국내 언론에서는 이 사건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지만, 사실 이 사건은 중요한 사건이다. 우리나라 서민 삶의 실상을 은근히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세계 10위 경제 대국이라고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라고 해 봤자 미국에 가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해야 하는 현실이다. 보통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그 피해자 속에는 동남아시아나 중국인 아니면 한국인이 포함돼 있다. 세계 10위 경제 대국이라고 자화자찬해도 결국 그것은 가진 자들만의 부유함이지 서민으로서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다시 말해 국가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서민들 개개인이 풍족하지 않으면 그것은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이 직업에 대한 차별이 없는 사회라고 생각하는 건 잘못된 상식이다. 신분제적인 차별의식은 아니지만, 미국에도 직업에 대한 차별은 있다. 특히 3D업종 종사자들은 주로 저학력 계층 미국인이나 이주노동자들이다. 미국의 중산층들은 이런 직종에 종사하는 것을 기피한다.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이 종사하는 일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 여전히 한국인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한국의 경제성장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게 한다. 한국의 빈부격차는 여전히 세계 최상위권이다. 국가는 점점 부자가 되는데 국민 개개인은 그에 못 미치며 여전히 가난하다.

한국 사회는 항상 경영 효율성을 내세운다. 경영 효율성을 위해서 인력을 감축하고, 경영 효율성을 위해서 월급을 동결하니 여러 소리 말라는 것이다. 과히 경영 효율의 이데올로기로 사람을 예속시키는 사회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그 효율성이라는 것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일까? 자원과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서 자원이 남게 되었을 때, 그것으로 우리의 삶을 더 풍족하고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효율성 추구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래서? 우리의 삶이 더 풍족해지고 있나? 그 남는 자원이 국민 개개인을 풍족하게 하는 데 쓰이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 효율성이라는 게 누구를 위한 효율성일까?

문재인 정부 5년, 한국의 빈부격차는 오히려 더 벌어졌다. 이유가 뭘까? 넷플릭스가 2017년에 만든 '로버트 라이시의 자본주의를 구하라(Saving the Capitalism)'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미국의 22대 노동부 장관을 역임하고 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로 있는 로버트 라이시는 "건강한 민주주의가 있어야 경제적 자유를 지켜낼 수 있다"고 했다. 국민 개개인이 경제적 자유를 확보하려면 좋은 일자리가 많아야 한다. 그래야 사회적으로도 최저임금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최저임금 정책이 좋다고 한들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가 적으면 고용주는 고용을 꺼리고 실업률은 더 높아진다.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려면 "창의적인 지식산업, 고급 일자리가 생길 수 있는 기반을 확충하라"는 것이 라이시의 주장이다. 고급 일자리 확충에 집중하기보다 최저임금만 급속하게 인상한 우리 정부의 정책이 과연 바람직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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