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풍요 속에서 여러 가지 불안증에 시달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조건을 극복하는 존재라는 깨달음 필요

▲ (사진=픽사베이) © 팝콘뉴스


(팝콘뉴스=김재용 기자) 현대인들은 항상 불안하다. 불안의 원인은 대부분 경제 상황과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 많다. 경제가 나빠질수록 사람들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불안증이나 우울증 등 갖가지 정신 이상으로 발전한다.

현실적인 불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직장과 관련된 불안일 것이다. 직장을 잃어 생계에 위협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또는 내가 원하는 직장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물론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사람이라면 여기에 더해서 성공과 승진에 대한 욕구 때문에 더 큰 불안에 시달리지만, 취업 준비를 하는 청년이라면 아무래도 취직과 관련된 두려움이 가장 큰 불안이 될 거다. 단순히 취직 그 자체의 문제도 있지만, 정말 내가 원하는 직장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크다. 특히 한국 사회는 집단주의 문화가 강하기 때문에 부모님이나 친척 등 나와 얽혀있는 관계의 시선도 의식해야 한다.

현대인은 삶의 공허감 잊기 위해 쾌락에 몰입하며 불안 증대시켜

소설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에 따르면 현대인은 사회에서 정해놓은 성공의 이상에 따르지 못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로 인해 존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시달린다고 한다. 또한 현재 내가 딛고 있는 계단보다 낮은 계단으로 떨어질 것에 대한 걱정은 매우 독성이 강해 생활의 광범위한 영역의 기능이 마비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불안으로 인해 정신건강이 마비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치료가 필요하다. 그 치료의 목표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삶의 의미를 상실하면 '의지의 맹목성'만 남아서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괴로움과 사람들끼리의 갈등으로 인해 고통만 남는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의지란 쉽게 말해 동물적 본능, 충동을 말한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삶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상실하면 동물적인 본능만 남고 그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공허한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빅터 프랭클( Viktor Emil Frankl)은 '실존적 공허'라고 했다. 실존적 공허는 현대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현상이다. 빅터 프랭클은 로고테라피라는 심리 치유법을 창안한 정신의학자이다. 실존적 공허가 원인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기도 한다. 현대인에 만연해 있는 우울증과 공격성, 이기주의, 중독성 등이 실존적 공허에서 비롯된다. 삶의 의미가 없으니 그 공허감을 잊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무언가 말초적 쾌락 거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실존적 공허감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긴장감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긴장감을 두려워하면 어떻게든지 해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크고 작은 긴장감을 불안해하며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빅터 프랭클은 내면의 긴장감은 정신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최악의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긴장감이 없으면 오히려 불안증, 우울증 등으로 최악의 삶을 맞이하게 된다. 내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되어야 할 나 사이의 긴장감은 필요하다. 이런 긴장은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지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삶의 의미를 깨달아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어

사람들은 항상성을 추구하지만, 사실 긴장이 없는 상태는 정신건강에 상당히 위험한 요소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의 의미를 찾는 정신적 역동성을 불러내는 것이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실존적 역동성이라고 한다.

빅터 프랭클은 현대인의 실존적 공허, 즉 삶의 무의미와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로고테라피라는 심리 치료 방법을 창안했다. 그는 이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로고테라피는 삶에 대한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을 이끌어내려고 한다.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밝히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수준에서가 아니라 정신적인 수준에서 환자의 자기 이해를 심화시켜야 한다. …(중략)… 실존적 공허가 만연한 현대에 있어 위험은 오히려 짐을 충분히 지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병상은 스트레스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공허로 끝난 스트레스의 해제에서도 생긴다. 의미의 상실에서 생기는 긴장의 결여는 긴장이 지나친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신건강에 위험한 징조이다. 긴장은 무차별적으로 회피할 것이 아니다. 사람은 꼭 생체항상성을 필요로 하지는 않으나, 인간 실존에의 의미에 고유한 요구 특성에 의해서 야기되는 그런 적절한 양의 긴장은 오히려 필요하다."

유대인이었던 빅터 프랭클은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부모, 형제, 아내를 모두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잃었다. 그 자신도 강제수용소에서 비인간적인 대우, 추위, 굶주림, 죽음에 대한 공포 등에 시달렸다. 빅터 프랭클은 그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에 대해 따뜻함과 인간성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희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머지않아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를 나갈 것이라는 희망이다. 그런 희망이 강력한 사람들은 대부분 끝까지 살아남았고, 반면에 그 속에서 금세 죽는 사람들은 희망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희망이라는 것이 바로 실존주의적 삶의 의미이다. 희망이 현대인의 불안증에 대한 강력한 치료약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실존적 역동성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에서는 '희망 고문'이라는 용어가 유행하고, 걸핏하면 희망 고문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하지만 희망이라는 것은 곧 삶의 의미이다. 희망이 없으면 사람은 삶의 의미를 잃고 곧 추락한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인간성을 상실하거나, 우울증 등 갖가지 정신병, 중독증에 시달린다. 반면에 인간에 대한 희망, 행복에 대한 희망이 충만한 사람은 인간성을 유지하고, 심리적 건강을 유지한다. 이를 생각하면 희망 고문이라는 용어가 얼마나 잘못된 용어인지 알 수 있다. 설사 그것이 하룻밤 희망으로만 끝나더라고 또 희망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며 그게 삶의 실존적 의미이다. 희망은 고문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삶의 의미이다.

빅터 프랭클은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조건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존재다.

참고자료

빅터 프랭클(지은이),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이시형(옮긴이), 청아출판사 2020

알랭 드 보통(지은이), 『불안』, 정영목(옮긴이), 은행나무 2011

박정희, 『불안,우울, 자살에 대한 실존 의미 치료』, 철학논총 63(2011), p248-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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