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각자 타고난 지능 다르기에 획일적인 지능 평가는 안 돼
학벌주의는 교육 파시즘,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말아야

▲ 서울대학교 정문(사진=서울대 홈페이지) © 팝콘뉴스


(팝콘뉴스=김재용 기자)수능 시험이 끝났다. 수험생들은 내내 마음고생을 꽤 했을 것이다. 이제는 입시 기간이다. 입시 기간은 고등학생 수험생과 그 가족들에겐 전쟁과도 같다. 지금은 입시원서를 온라인으로 접수하기 때문에 무척 편리해졌다. 그래서 그런지 겉으로는 조용해 보인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원서를 들고 지원 학교에 직접 가서 원서를 제출해야 했기에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마감 때까지 눈치작전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미달 학과나 경쟁률이 낮은 학과는 커트라인 합격선이 낮을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을 파악하기 위한 '눈치보기 전략'이 치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모습들은 참 우습고 한심해 보인다. 하지만 전투가 예전의 전방에서 지금은 후방으로 갔을 뿐, 여전히 전쟁은 지속되고 있다. 그 전쟁은 우리나라 특유의 왜곡된 교육문화인 '학벌주의'에서 비롯된다.

학벌주의에 대한 비판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지난 1996년 전북대의 강준만 교수가 '서울대의 나라'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대중적으로 크게 이슈가 되었다. 이 책 출간에 탄력을 받고 그동안 재야에서 학벌주의를 비판하던 일부 시민단체, 교육자나 대학교수들이 함께 학벌주의 비판 대열에 동참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학벌 지향 의식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 20년 동안 지방국립대의 위상이 더욱 떨어지고 수도권 대학의 합격점수가 오르는 등 한편으론 학벌주의가 더 강화되기도 했다.

다만 예전보다 다소 변화를 보인 면도 있다. 예전에는 학력고사(수능시험 이전 체제)와 수능 점수에 따라서 대학의 합격선이 서울대에서부터 다음 대학까지 일렬로 나열되는 획일적인 학벌주의였다. 예를 들어서 서울대 지원자 중 꼴찌가 고려대 지원해서 1등으로 합격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기업의 블라인드 채용의 확대, 수시 전형의 확대 등 다양한 입시 제도의 변화와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이 정도의 획일적인 모습은 다소 변화를 보였다. 명문대를 갈 수 있음에도 자신이 원하는 진로에 따라 비명문대(이 용어가 적절치는 않지만)나 특수대학으로 가는 학생들이 증가하고, 대학 순위에 따라 합격점수가 일렬로 나열되는 획일적인 현상도 다소 완화됐다. 그러나 학벌주의 그 자체가 여전히 공고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고등학교 때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서열이 높은 대학에 갔기에 그들이 남과 다른 특혜를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 같으면 왜 많은 전문가가 학벌주의를 비판할까?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는 획일적 능력주의의 환상도 깨야 한다. 이미 유명한 통계자료가 되기도 했지만, 명문대 진학 학생들의 상당수가 서울 강남 지역에 거주하고 그들이 대부분 중류층이나 상류층 이상의 집안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능력 신장에 경제적 지원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은 이미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 등 세계적인 교육학자들이 인정하는 바이다.

게다가 수능 시험은 사고력을 평가하는 시험이다. 사고력을 100% 발휘하기 위해서는 정서적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제적으로(또는 다른 이유로) 불안한 집의 학생보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집의 학생이 정서적으로 더 안정적인 것은 당연하다. 공부하기 위한 여러 가지 교육적 지원을 더 받을 수 있는 환경에 있다면, 그만큼 획득할 수 있는 시험 점수도 늘어난다는 것은 상식적인 판단이다. 이런 사실에 입각했을 때 '완벽하게 공정한 능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능력주의가 가장 공정하다는 주장이야말로 전형적인 '현상학적 장'(동일한 현상이라도 개인에 따라 다르게 지각하고 경험하는 것)인 셈이다. 쉽게 말해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이다.

세계적인 교육학자이자 심리학자인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ner)의 다중지능이론도 현대 교육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이론이다. 사람은 각자 타고난 지능이 다르므로 획일적으로 지능을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드너에 따르면 "사업이나 운동에서 성공하는 것 또한 지능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각기 다른 부분에서 다른 종류의 지능을 사용한다. 더 낫거나 못한 지능이 아닌, 다른 지능이다. 즉, 아인슈타인은 마이클 조던보다 더 똑똑하거나 덜 똑똑하지 않다. 그보다는, 아인슈타인의 지능은 다른 영역에 더 적합한 것"이다. 따라서 능력주의는 다양한 측면에서 고려해 봐야 하는 것이다.

서울대처럼 최고 학부를 중심으로 하는 학벌주의는 다른 나라에도 있는데 굳이 서울대만 비판하는 것은 헐뜯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다른 나라에도 초엘리트 교육기관은 존재한다. 예를 들어서 프랑스에도 초엘리트 행정학교인 국립행정학교(ENA)가 있다. 프랑스의 정관계 주요 인사들은 이 학교 출신들이 독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 학교는 엘리트 교육기관이지 서울대처럼 대한민국 위에 군림하는 학벌이 아니다. 국립행정학교를 졸업했다고 해서 기업에서 채용할 때 특별대우를 받는다거나 이 학교에 입학했다고 해서 우리나라처럼 온 동네에 현수막을 내걸고 '축, 이장 아들 아무개 국립행정학교 입학'이라는 촌스러운 모습을 보이지도 않는다. 이 학교는 오직 행정관료만을 기르는 교육기관이다.

하지만 서울대는 국내에서 모든 분야를 독식하는 하나의 권력기관의 위상을 지닌다. 서울대를 졸업하면 기업체에 취업하기에도 유리하고, 다른 분야에 종사할 때도 특별한 위상을 지닌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적성과 관련 없이 무조건 서울대에 가는 것을 선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서구의 학력주의가 우리나라의 학벌주의와 다른 점이다. 이웃 일본에도 도쿄대의 학벌주의는 심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런 문제의식을 느끼고 오랫동안 학벌주의를 개혁한 결과 지금은 도쿄대의 학벌주의가 많이 완화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학벌주의는 당연히 여러 가지 사회적 폐해를 양산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서울대가 모든 분야를 독식하는 사회에서는 서울대 출신들이 자기들만의 기득권을 형성해서 갖가지 사회적 부조리를 양산한다. 고등학교에서도 명문대에 학생을 얼마나 보냈느냐로 고등학교의 위상이 정해지면서 폭력적인 학교 교육문화가 형성된다. 명문대에 갈 수 있는 학생은 1~3%에 불과하다. 나머지 97%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3%를 위해서 97%를 희생시킨다면 그것이야말로 전체주의 사회와 다를 게 무엇일까?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나,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미야베 미유키 등은 아예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고졸이다. 우리나라는 뛰어난 능력이 있음에도 유명한 대학을 나오지 않았거나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무시당하거나 그 능력을 경시당하는 풍토가 심한데 이것이 다 학벌주의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중소기업(지방 기업)에 재직하던 직장인이 노벨상을 받기도 한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은 비명문대 출신 중소기업 재직자가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런 일을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노벨상 수상자 한 명도 없다(평화상을 제외하고). 학벌주의가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의 전체적인 역량 발휘를 막는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강준만 교수는 자신의 저서 '서울대의 나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의 대학입시 전쟁은 교육 파시즘이다. 국민의 일상적 삶터까지 치열한 전쟁터로 몰아가는 그 지긋지긋한 전쟁은 파시즘 체제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만 강요할 뿐이다."

지금 수험생들은 잘 생각해서 대학을 선정해야 한다. 맹목적으로 명문대학이나 서열이 더 높은 대학에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대학을 선택하면 된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더 유리하다.

참고자료

강준만, 『서울대의 나라』, 개마고원, 1996

나카무라 교수 '中企서 맘껏 연구했던 것이 노벨상 수상 비결', 이투데이, 2014년 10월 22일자

'학벌주의와 기업의 경쟁력', 한국경제, 2007년 10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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