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휴가 중 사고로 척수마비 된 가수 임일주 씨...그가 노래하는 '인생'

(팝콘뉴스=박윤미 기자)* 울타리[fence]: 모든 사람이 가족과 이웃이 되는 이야기들.

대부분의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부모와 가정, 학교 같은 '사회적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간혹 울타리 없는, 누구보다 울타리가 필요한, 울타리 밖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스스로 울타리를 걷어찬 이들도 있습니다. 코너 [울타리]는 그런 이웃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독자들의 관심이 그들에게 필요한 울타리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신설한 코너입니다. 기사를 읽는 동안만큼은 마음의 울타리를 활짝 열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성신여대 인근 CGV에서 만난 가수 임일주 씨. 인터뷰할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 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곳에서 어렵게 만났다.(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창창한 앞날이었다. 그것은 남자뿐 아니라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이 '당연한 일'로 여기는 것이었다.

당연한 것은 없었다. 예상 못 한 사고가 생겼다. 창창한 앞날은커녕 당장 제 몸에 달린 손과 발조차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당연히 죽어야 마땅한 목숨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것 또한 남자의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사고 후 5년간 세상과 단절한 채 누워만 있던 남자는 지금 세상 앞에 나와 노래하고 있다.

한때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창창한 앞날은 이렇게 돌풍과 진눈깨비를 온몸으로 다 맞게 하고서야 비로소 남자 앞에 다시 나타났다.

임일주(49) 씨는 KBS 1TV 간판 프로그램인 '아침마당'의 '도전 꿈의 무대'를 통해 얼굴과 목소리를 알린 장애인 가수다. 그는 이 프로그램에 여러 번 출연하며 특유의 미성과 그만이 가진 울림으로 사회자와 패널 그리고 TV 앞에 앉은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임일주 씨는 이 프로그램에서 우승했을 당시 시청자들이 참여하는 전화투표에서 3만 6240표를 얻었다. 숫자가 말해주듯 이처럼 많은 사람이 임 씨의 노래와 삶을 위로하고 격려한 것이다.

가장 최근이라 할 수 있는 지난 6월 초 방송에서는 패널로 나온 트로트 가수 진성 씨가 임 씨에게 "보이스가 능력 있고 독특하다"고 칭찬했다. 진성 씨는 또 "정상의 1/3밖에 되지 않는 폐활량으로 노래를 표현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며 "임일주 씨는 8부 능선을 넘었다. 앞으로 20% 정상을 위해 노력한다면 분명 꿈이 이뤄지리라 확신한다"고 격려하기도 했다.

임 씨가 대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실력파 가수에게서 이 같은 극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임 씨에게 '실력'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임일주 씨의 공연 모습.(사진=임일주 씨 제공) © 팝콘뉴스


임 씨는 지난 2016년 장애인 스타 발굴프로젝트 제1회 이음가요제에서 대상을 받는 등 노래가 있는 '판'에서 존재감을 과시한 적이 여러 번이다. 늦깎이 대학생이 돼 만난 동기이자 한참 어린 비장애인 동생들과 함께 앨범을 발매한 전력도 있으며 당연히 솔로 곡을 내고 나름의 활동도 하고 있을 정도로 이 분야에 잔뼈가 굵다.

음색만큼이나 눈에 띄는 것은 그의 외모. 물론 본인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미남이다"라고 칭찬하면 얼굴이 빨개지며 손사래 친다. 하지만 "목소리가 좋다"거나 "미성이다"는 칭찬을 들으면 입을 다물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도 아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노래를 잘하고 좋아하는지를.

임일주 씨는 20대 초반이던 1996년, 제대 두 달을 앞두고 휴가 중 교통사고로 전신을 쓸 수 없는 척수마비 장애인이 됐다. 친구가 운전대를 잡은 차에 올라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이후 기억이 없다. 눈을 떠보니 수술은 끝나 있었다. 입원실로 옮겨진 이후로는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도대체 왜 사고가 났는지 알 수 없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운전한 친구는 전혀 다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친구는 이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남들보다 잘하는 게 딱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노래였거든요. 고등학생이 라이브카페에서 노래해서 돈을 다 벌 정도였어요. 살던 동네에서는 '임일주' 하면 '노래 잘하는 애'로 통하기도 했고요. 지금 제가 부르는 노래는 그 시절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고를 당하고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지만 다시 노래하고자 했을 때 예전 같지 않은 목소리와 성량은 정말 깊은 좌절을 맛보게 하더라고요."

▲ 임일주 씨의 공연 모습.(사진=임일주 씨 제공) © 팝콘뉴스


노래를 다시 시작하기까지도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니 꿈조차 꿀 수 없었다. 같은 병원에서 만난 같은 처지의 탁용준 화가 부부에게서 '장애인중창단' 권유를 받지 않았더라면 남 앞에서 노래 부르는 일은 지금도 '과거'에 봉인되어 있을 일이었다.

임 씨는 장애인중창단 단원 생활을 하며 매일 광장동과 가산동을 오갔고, 몇 시간씩 연습실에서 고함 비슷한 소리를 내며 자신만의 노하우를 만들어 나갔다. 연습 시간을 늘리고 싶어 집을 옮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는 실력 때문에 우울한 마음으로 귀가하는 날이 많았다. 몇 번이나 포기할까를 생각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시간과 노력은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임 씨에게도 뜻하지 않은 날 뜻밖의 선물이 돼 돌아왔다.

"몇 년 동안 같은 시간 소리 지르며 연습하니 희망방송 대표가 저라는 사람에 관해 궁금해하더라고요. 그렇게 중창단 생활을 하며 연습이 없는 날에도 나와 연습하는 저를 지켜봐 주신 분들로부터 격려를 많이 받았어요. 자신감이 생겼어요. 짧은 삶이긴 하지만 사고 전과 사고 이후의 제 삶이 뮤지컬로 제작된 것도 저를 알아봐 주신 분들 덕분이죠."

"중창단 단원들은 같은 장애인이기는 하지만 장애 정도가 저만큼 심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고, 또 대부분 시각장애인이라 팀에 있을 때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위축돼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중창단 활동을 통해 교회나 병원 교도소 같은 곳에서 공연하며 많은 사람에게 위로를 전할 수 있었기에 저 또한 위로받지 않았나 생각해요."

임 씨는 지금도 솔로 가수 활동을 비롯해 뮤지컬 배우, 연극배우 등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영역 어디든 가리지 않고 무대에 오르고 있다. 같은 장애인이면서 자신과 같은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선생님이 돼주고도 있다. 그래서 그는 매주 빽빽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사고 이후 5년간 집에서만 지냈어요. 제일 친한 친구와도 연락을 안 했어요. 그때가 PC통신 시절이었는데 하이텔 장애인동호회 '두리하나'에 가입해 저와 같은 처지인 사람들과 온라인으로 대화를 나누는 게 사람과의 교류 전부였어요. 그러다 정모 이야기가 나왔고, 그걸 계기로 대문을 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 아내는 당시 봉사자였는데 그렇게 만나 제 나이 서른한 살에 결혼해 18년째 부부로 살고 있어요."

"정모에 가고는 싶은데 지금처럼 장애인 콜택시가 잘 돼 있는 시절도 아니고, 혼자는 도저히 갈 수 없고 생업이 있는 어머니한테 부탁하는 건 말이 안 되고, 고민을 거듭하다 사고 전까지 가장 친했던 친구에게 어렵게 연락해 도움을 청했어요. 오랜만에 전화하니 친구가 얼마나 욕을 하는지. 제 연락을 기다렸다고 하더라구요. 이후로 연락 끊고 지냈던 친구들을 차츰 다시 만나고 같이 경포대도 놀러 가고 동네 노래방도 다니면서 잊고 있던 예전의 삶을 조금씩 찾을 수 있었어요. 그때 생각했어요. 변한 건 하나도 없는데 나는 다 변했다는 착각 속에 누워만 지냈구나..."

▲ 성신여대 인근 CGV에서 만난 가수 임일주 씨.(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임 씨의 방송 출연을 가장 기뻐한 건 그의 어머니였다.

임 씨 어머니는 사별 후 홀로 아들을 키우면서 그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아들이 삶의 전부였지만 가수가 되겠다는 아들의 꿈만큼은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아들이 힘든 길을 걷게 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런 아들에게 부지불식간에 사고가 일어났다. 한창 꽃피어야 할 나이에 가수는커녕 평범한 생활조차 할 수 없게 된 아들을 보며 어머니는 매일 밤 가슴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어머니의 바람대로 성장했다. 남들처럼 결혼도 하고 비록 늦은 나이지만 대학 졸업장도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토록 하고 싶다던 가수의 꿈도 스스로 이뤄냈다. 게다가 TV에 그것도 유명 방송에 출연해 노래 부르고 1등까지 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임 씨는 말했다.

"사고 후 집에서 지낼 때 어머니가 우시는 모습을 본 일이 있어요. 그날 철이 든 것 같아요. 다시는 어머니 눈에 눈물 나게 하면 안 되겠다. 어떻게든 사람답게 살아야겠다는 그런 다짐을 했어요. 사실은 어머니 돌아가시면 다음 날 따라갈까 생각을 한 적도 있거든요. 어머니보다 먼저 가는 건 불효니까. 그런 어머니가 제가 TV에 나오는 걸 보시고는 엄청나게 자랑스러워하시고 여기저기서 걸려 오는 전화를 받으시다 목이 다 쉬셨다고 이야기하시니 울컥하더라고요.”

이어 그는 "제 아내는 장애를 지닌 제게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가르쳐 준 사람이에요. 아내가 아니었다면 저는 다시 마이크 앞에 설 용기조차 갖지 못했을 거예요. 가끔 집사람이 저 때문에 삶의 많은 부분을 희생한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프기도 하지만, 앞으로 더 행복하게 해주는 것으로 갚으며 살려고요"라며 "그리고 중도에 장애 입으신 분들, 그분들의 가족들이 얼마나 힘이 드신 지를 저는 알아요. 제가 그 길을 걸어봤으니까요. 부디 저를 보시고 좋은 날이 온다는 믿음으로 힘내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털어놨다.

임 씨는 장애인은 무엇을 하든 완벽하게 잘하지는 못 할 것이라는 일부의 편협한 시선을 깨고 싶다고 했다. 지금 하는 여러 가지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무는 일도 임 씨 스스로 자신이 맡긴 업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노래를 통해 세상의 장애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줄여나가는 것이 삶을 마칠 때까지 과업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끝낸 임 씨는 휠체어를 움직이며 이런 말을 전했다.

"우리 인터뷰하는 장소 하나 찾기도 이렇게 힘이 드네요. 커피숍에 가고 싶어도 휠체어 돌릴 만한 공간 없는 곳도 많아요. 장애인 콜택시도 일반 택시와는 달리 예약제로 운영돼 어떤 때는 바로 오고 어쩔 땐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이나 걸려 예측이 어려워요. 그래서 시간이 곱절로 들어도 지하철을 탈 때가 많아요. 장애인 활동보조서비스도 결혼한 장애인은 시간을 줄이는데, 결혼한 장애인은 활동이 줄어드는 걸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반려자가 생업을 놓고 도울 것으로 생각한 건지 아직도 장애인 복지 정책에 손볼 곳이 많아요."

저작권자 © 팝콘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