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협동조합 '다시시작' 안연원 이사장

▲ 사회적협동조합 '다시시작' 안연원 이사장(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팝콘뉴스=이준호 기자)* 굿업! 평생현역 코너는 인생의 후반전에서 새로운 일터에서 즐겁게 살아가는 중장년을 만나러 갑니다. 굿업은 정말 대단하다는 Good Up과 좋은 직업(業)을 뜻합니다.

치명적이지 않은 암이 없다고 하지만, 유방암은 의학적 이유를 넘어 다른 의미에서도 치명적인 암종이다. 유방암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40~50대의 여성은 가정에서 입시와 독립을 앞둔 자녀와 경제력을 잃어가는 남편을 받쳐야 하는 기둥과 같은 존재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의 부재는 가정을 파탄으로 치닫게 만든다. 때문에 환자 입장에서는 누구보다도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다. 유방암 환우들이 모여 설립한 사회적협동조합 '다시시작'에서 만난 안연원(63) 이사장은 "환자가 되어보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며 "병을 겪어본 사람이 누구보다 잘 도울 수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다 같이 모여 밥을 먹다 누구 한 명이 졸린다고 그 자리에 눕는 경우가 있어요. 보통 사람들 상식으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죠. 하지만 힘든 항암치료를 겪어봤다면 누구나 이해해요. 그래서 우리는 주저 없이 주변에 양해를 구하고, 잠잘 공간을 마련하고, 덮을 것을 찾으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요.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다시 식사를 시작하죠. 병과 싸우는 일은 무척이나 고되고 힘든 일이기도 하면서, 우리에게는 일상의 일부이기도 해요."

안 이사장 역시 유방암을 겪었다. 물론 병과 싸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1999년 처음 병을 발견했을 때에는 당연히 직장에 복귀할 줄 알았고,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직장으로 되돌아갔었다. 그러나 3년 만에 포기하고 말았다. 치료 과정에서 겪는 체력 저하와 피로감 등으로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반복되는 재발과 전이는 그녀의 심신을 망가뜨렸다.

"병이 쉽게 낫질 않고 계속 괴롭히니까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더라고요. 우울감과 피로감, 불면, 스트레스, 재발에 대한 두려움은 암 환자에게는 그림자 같은 것이에요. 아무리 빨리 달려도 떨어지지 않죠. 모든 것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퇴직금을 모두 경비로 써버릴 정도로 여행도 다녔지만 큰 도움이 되진 않았어요. 그렇게 3번째 치료로 지쳐 있을 때 지인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어요. 빨리 건강을 회복해서 아픈 사람에게 용기 줄 수 있는 존재가 되라는 주문이었는데, 아픈 사람에게 봉사하라는 이야기가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죠.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을 되새길수록 힘이 되더라고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어요."

▲ 안연원 이사장이 '다시시작'의 비누 제품을 포장하는 모습. 안 이사장은 "작은 일자리라도 환우들의 사회 복귀와 투병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했다.(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그녀에게 가족만큼이나 힘이 되어줬던 존재는 바로 치료받았던 병원인 국립암센터의 유방암 환우회 '민들레회'의 존재였다. 다른 유방암 환자와 마찬가지로 민들레회를 통해 병원이나 의료진이 들려주지 않는 요긴한 정보들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다. 따뜻한 응원도 힘이 됐다.

"유방암 수술을 하면서 림프절을 절제하는 경우 무거운 것을 들거나 관리를 잘못하면 림프부종이 발병해요. 의사는 무조건 몇 그램 이상은 들지 말라고만 하지만, 환자 대부분이 치료와 살림을 병행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손에 뭘 들지 않고 생활할 수는 없잖아요. 그럴 때 민들레회 회원들끼리 '이럴 땐 이 정도는 괜찮더라' 혹은 '일을 한 후에는 이렇게 관리하면 후유증을 줄일 수 있더라' 하면서 서로 경험을 나눠요. 또 마음이 약해진 암 환자들은 쉽게 유혹에 빠지기 쉬운데, 검증되지 않은 잘못된 길을 선택하는 것을 막아주기도 하죠."

지인의 조언처럼 그녀는 환우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노력 역시 잊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경기민요. 안 이사장은 경기민요를 배우면서 "투병 과정에서 겪었던 나쁜 경험이 만든 '화'들이 토해져 나오면서 밝은 에너지로 바뀌는 기분을 느꼈다"고 말했다. 강사 섭외와 교육 프로그램 운영을 위해 동분서주해 외부 지원까지 받아내면서 민들레회 환우들에게 경기민요를 소개했다. 환우들은 2019년 3월 21일 암 예방의 날에 보건복지부 장관 앞에서 공연까지 했다.

안 이사장은 민들레회 회장직을 맡았던 2018년 고양시에서 진행한 사회적협동조합 아카데미에 참여하면서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민들레회 회원들이 뭉쳐 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들면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기세를 몰아 2019년 보건복지부의 사회적협동조합 인가를 받았다. '다시시작'의 출발이었다. 이어 국립암센터와 고양시의 암환자 사회복귀지원센터로도 지정됐다. 현재는 사회적가치지표(SVI) 측정과 여성기업 인증도 준비 중이다.

"유방암 환우들이 모여 서로를 도울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싶었죠. 제품의 제조, 판매 과정에서 환우들의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고, 발생한 수익으로 다시 환우를 도울 수 있는 구조를 원했어요. 유방암 환우들은 대부분 경력단절 여성들이기 때문에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일반인 보다 체력적으로도 훨씬 불리하고요. 결국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가장 환우를 잘 이해하는 우리라는 생각이었죠."

▲ 사회적협동조합 '다시시작' 안연원 이사장(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다시시작'의 첫 번째 아이템은 비누였다. 오랜 투병 과정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이 환우를 위한 비누의 부족이었고, 마침 민들레회 회원을 통해 제조를 도움받을 수 있었다. 세안 비누 '보들이'와 샤워 비누 '촉촉이', 샴푸 비누 '머리애(愛)'가 그렇게 탄생했다. 비누에는 항암치료 과정에서 그들을 괴롭게 했던 탈모로 인한 따끔거림, 피부 각질, 수술 부위 자극 등으로 괴로웠던 경험이 함께 녹아 있는 셈이다. 모두 화학제품 사용을 최소화한 저자극 기능성 제품이다. 코로나 시대에 필수가 된 손 세정 비누나 애견을 위한 제품도 만들었다.

"우리끼리 힘을 모아 만들고, 하나하나 우리 손으로 해내다 보니 어설픈 것들이 많아요. 제품의 판매, 마케팅 등도 아직 초보 수준이고. 그래도 보건복지부나 암생존자통합지지센터 등 관련 기관에서 저희의 존재를 아시고는 많이 도와주세요. 기념품으로 나갔던 제품들의 반응이 좋으면서 판매가 이어지고 있어요. 네이버를 통해 온라인 판매도 시작하고 있고요."

안 이사장의 최종 목표는 '다시시작'을 영국의 유명한 암 환자 지원기관인 매기 센터(Maggie's Centres)와 같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매기 센터는 암 환자를 위한 일종의 자선기관으로 암 환자를 위한 정보와 조언, 심신을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수익활동이 활성화되고 기부금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갖춰지면 '다시시작'을 암 환우를 위한 사랑방으로 만들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해보고 싶어요. 코로나 때문에 원격수업으로 수술을 위한 재활교육과 암 환자 대상의 원예교육을 진행해 봤는데 반응이 무척 좋았어요. 사실 만나서 수다만 나눠도 병이 가벼워지는 기분이거든요. 집에서 혼자서 투병하는 것은 외롭고 힘들어요. 환우들이 '다시시작'에서 함께 정보도 공유하고 투병에 도움 되는 것들을 배우며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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