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 및 유통업계 '동물복지 제품' 판매 확대...추가 정책 마련은 '숙제'

(팝콘뉴스=편슬기 기자)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비좁은 공간에 수백 마리의 닭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다. 소비자들이 마트를 통해 구매하는 달걀은 대부분 이런 공간에서 사육되는 닭들이 낳은 것이다.

사람들이 자주 구매하는 돼지고기나 우유 등의 제품도 일정한 규격으로 정해진 돈사, 젖소 목장과 같은 비좁고 폐쇄된 시설에서 키워진 돼지나 소에게서 나온 제품들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제품을 소비하는 데 있어 돼지가 어떤 환경에서 키워지고 닭이 어떤 사료를 먹는지는 제품을 구매할 때 고려되는 부분은 아니었다. 품질이 좋은지 가격이 어떤지의 여부가 가장 중요한 구매 결정 요소였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항생제를 먹이지 않은 돼지인지, 방목을 통해 자유롭게 키워진 닭인지, 넓고 쾌적한 축사에서 짜인 우유인지 등 '동물복지'를 얼마나 준수했는지가 제품 구매를 판가름하는 중요 요소로 자리 잡게 됐다.


'동물복지 제품' 언제, 왜 나왔을까?


▲ 이마트의 달걀 코너(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동물복지'란 말이 한국에서 등장한 것은 지난 2007년 한국과 EU 간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과정에서이다.

2007년 9월 제 3차 협상에서 EU 측이 "한국에서는 닭들이 학대받고 있다. 한국 닭은 좁은 사육장에서 키워지며, 도축 과정 역시 불투명하다. 동물복지가 보장되지 않은 축산물을 (EU가) 수입하기 곤란하다"라며 '동물복지' 시행을 요구한 것이다.

EU가 제안한 '동물복지 참여' 요구가 당시 협상의 필요충분 조건은 아니었지만, 이같은 내용이 알려지면서 국내에서는 기존의 공장식 사육을 되돌아보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후 같은해 12월 경기도 안성시가 '동물복지농장 인증 조례'를 만들며, 점차 확산됐다.

이후 2012년 산란계(달걀)에 대해 동물복지 축산농장 인증제가 처음 시행되며, 이듬해인 2013년에는 돼지, 2014년에는 닭, 2015년에는 한ㆍ육우 및 젖소, 2016년 오리로 점차 확대됐다. 인증은 농림축산검역본부가 담당하고 있다.

이처럼 제도적으로 변화가 이뤄졌지만, 당시만 해도 여전히 일반 소비자에게는 '동물복지'는 낯설고 먼 이야기였다.

하지만 2017년'살충제 달걀 파동'이 발생하면서, 멀게 느껴졌던 동물복지에 대해 소비자 관심이 높아지게 된다.

'살충제 달걀 파동'은 15개 EU국가와 스위스, 홍콩 등지에서 유통된 달걀에 살충제인 '피프로닐'이 기준치를 초과해 생산, 유통된 사건이다.

'피프로닐'은 주로 농가에서 곤충이나 진드기를 잡는 데 쓰이는데, 소나 돼지, 닭 등 사람이 직접 섭취하는 동물에게는 사용이 금지됐다.

사람 신체에 흡수되면 구토나 복통, 현기증 등을 유발하고, 몸 속에 축척되면 간이나 신장 등 해독 기능을 하는 체내 기관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은 피프로닐 오염 달걀은 같은해 8월 국내에서 생산된 달걀에서도 발견되며 파문이 커진다.

농림축산식품부가 2017년 8월 14일 친환경 산란농장을 대상으로 일제 잔류 농약 검사를 실시했는데, 이 과정에서 경기도 남양주시와 광주시의 농가 두 곳에서 피프로닐 등 농약 성분이 검출된 것이다.

이후 농식품부는 전국 모든 산란계 농장의 달걀 출하를 전격 중단하고, 전수검사를 실시한다.

그 결과 전국 1천 200여 개 산란계 농장 가운데 52곳(친환경 농가 31개,일반농가 21개)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은 달걀이 검출됐다.

그리고 살균제 달걀 파동의 배경은A4용지 크기보다도 작은 배터리 케이지에서 닭을 사육했던 비위생적인 환경이 원인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비좁고 빽빽하게 들어찬 공간에서 많은 닭을 사육하다 보니 진드기와 같은 기생충 발생이 쉽고 한 번 발생하면 폭발적으로 퍼져나가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살충제를 뿌린 것이 원인이었다.

다량의 살충제를 산란계가 흡입하면서 달걀까지 살충제 성분이 남은 것이다.

살충제 달걀 파동으로 농식품부는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대상으로 시행하고 있던 축산물 이력제를 2017년 하반기 시범사업한 뒤 2019년부터 닭고기와 계란에도 적용한다는 내용의 종합대책을 발표한다.

이와 함께 살충제 달걀 사태 주범으로 지목된 '밀집 사육 방식' 역시 공간을 넉넉히하는 선진국형으로 바꾼다는 방침을 내놓는다.

업계 관계자는 "살충제 달걀 파동으로 소비자들이 닭이 사육되는 환경에 높은 관심을 가지게 됐다. 많은 산란계들이 극도로 열악한 사육 환경에서 비위생적으로 관리되는 걸 알게 되면서 '동물복지'에 대한 인식과 수요가 발생했고 '동물복지' 제품들이 출시되는 큰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농림부에 따르면 2019년 기준 2,000여 개의 산란계 농가 중 15%의 농장이 동물복지 인증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인증 기준, 사육 및 산란ㆍ분만 시설 등 세세하게 규정


▲ 홈플러스 닭고기 코너에 진열된 하림의 동물복지 닭가슴살(사진=팝콘뉴스). © 팝콘뉴스

앞서 언급한 달걀 외에도 동물복지 인증 마크가 붙은 제품은 다양하다.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등 육류는 물론 유제품까지 축산물 관련 제품이 대상이다.

동물복지 축산농장 인증은 시설 기준과 '동물의 5대 자유'인 ▲배고픔과 갈증 영양불량으로부터의 자유 ▲불안과 스트레스로부터의 자유 ▲정상적 행동을 표현할 자유 ▲통증ㆍ상해ㆍ질병으로부터의 자유 ▲불편함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해야 받을 수 있다.

계사의사육시설은충분한 자연환기 및 햇빛이 제공돼야 하며 형태와 시설이 닭의 건강을 유지하고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개별 케이즈 등에서 지속적으로 가둬서 사육하는 것을 금지한다.

산란장소의 기준도 별도로 정해져있다. 산란계 7마리 당 1개 이상의 개별 산란상 또는 산란계 120마리 당 1㎡ 이상의 산란 장소를 제공해야 한다. 이외에도 횃대, 깔짚, 실외 방목장 등 법에 정해진 기준에 따라 설치해야 인증을 받을 수 있다.

돈사 역시 사육시설의 기준은 계사와 비슷하다. 다만 분만시설의 경우 모돈이 몸을 완전히 뻗을 수 있는 충분한 크기여야 하며 모돈과 자돈에게 안락함을 줄 수 있도록 설계 및 관리돼야 한다. 사육밀도의 경우 체중과 면적으로 나눠지며 누울 자리(모돈 1.5㎡, 미경산동 : 두당 1㎡)를 포함해 모돈은 두당 3.5㎡, 미경산돈은 두당 2.5㎡의 면적을 제공해야 한다.

젖소 농장의 경우 사료의 60% 이상을 건초 등 풀사료를 포함해야하며사육단계별로 두당 사료조의 길이를 달리 제공한다. 송아지는 40㎝이며 이외번식, 비육, 건유, 착유우는 70㎝의 길이를 지켜야한다.최소 급수공간은 두 당 최소 450~700㎜의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이외에도 체중별 두당 휴식공간과 최소 소요면적을 준수해야 하며 방목장은 1마리당 337㎡의 공간을 제공해야하는 등 엄격한 기준을 두고 있다.

농림축산검역본부의 동물복지 축산농장 인증기준을 모두 충족한 경우 동물복지 농장 인증을 받을 수 있다. 이렇다 보니 동물복지 축산품은 일반 축산품에 비해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

이마트 기준 일반 달걀과동물복지 달걀의 가격은A제품(30개입) 7,024원 기준 최소 120.6%에서 최대 254.4%가량 가격이 차이났다. 삼겹살의 경우 1,980원(100g) 기준 40.1%~126.9%까지 차이났다. 닭고기의 경우 삼계탕용 1㎏ 기준 b 9,500원으로 가장 저렴한 제품과 42.3%가량 더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2020년 1월 기준 양돈부문 동물복지 인증농장은 전국에 17곳이며 동물복지 우유 농장은 12곳이다.


가격이 비싸도 '동물복지 제품' 구매해요


지난 2019년도돼지와 소, 닭 등 농장동물 복지수준에 대한 국민 인식조사를 살펴보면'개선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57.4%로 축산 농가의 시설 및 사육 방식 변화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여기에 지난해부터 창궐한 코로나19로 인해위생과 건강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지면서 동물복지 제품에 대한 인식 역시 이전에 비해 높아지고, 이에 따라 구매 역시 늘어나는 추세이다.

실제롯데마트의 경우 지난해 2~3월 전체 닭고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4.2% 감소하는 상황에서도 동물복지 인증을 받은 닭고기 제품은 오히려 30% 이상 판매가 증가했다.

이마트에서 판매하는 동물복지 달걀 제품 역시 지난해 1월부터 3월 기준 전년 동기 대비 44.9% 판매량이 증가해 건강하게 생산되는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긍정도가 올라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일반 달걀과 동물복지 달걀을 장바구니에 넣은 남성 소비자(사진=팝콘뉴스). ©팝콘뉴스

서울 마포구 한 대형마트 신선식품 코너에서 근무하는 직원 박 모씨는 "요즘 들어 부쩍 동물복지 제품을 구매해가는 소비자들이 늘었다"며 달라진 풍경을 전했다.

박 씨는 "장을 볼 때 매번은 아니더라도 건강을 생각해서 동물복지 달걀을 종종 구매한다"라고 덧붙였다.

매장에서 만난 한 남성 소비자는 "아내가 꼭 동물복지 제품만 고집한다"라며 일반 달걀 제품과 동물복지 달걀 제품을 함께 구입하기도 했다.

동물복지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점점 커지면서 식품업계도 동물복지 제품 출시에 열을 올리는 모습이다.

육계 코너를 방문하니 하림에서 출시한 동물복지 닭고기 상품도 진열돼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선진에서는 동물복지 돼지고기 분야에 앞장서고 있다. SPC삼립은 동물복지 돼지로 만든 햄 선물세트를 출시했다.

풀무원은 오는 2028년까지 풀무원에서 생산하는 모든 달걀 제품을 동물복지 달걀로 교체할 것을 선언했으며, 마켓컬리는 판매 중인 모든 식용란을 2030년까지 동물복지 달걀로 바꿀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여전히 국내 동물복지 제품 확대를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는 지적도 있다. 우선 산란계(달걀)을 제외하면 여전히 돼지나 소농가는 동물복지에 소극적이다.

농림축산검역본부에 따르면 지난 2019년 기준 양돈 동물복지 농가는 전체 6천 100여 곳 중 18곳(0.3%)에 불과했다. 또 젖소는 6천 2백여 곳 중 11곳(0.2%)에 그쳤다. 산란계(15%), 육계(5.9%)에 비교하면 여전히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산란계(달걀)가 유일하게 동물복지 인증 비율이 두 자릿수를 차지했지만, 산란계 역시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자유롭게 방목장에서 자라는 산란계는 100곳 중 4곳에 불과하며, 여전히 대부분의 산란계는 면적에 차이가 있을뿐 좁은 케이지 않에서 사육된다는 점이다.

동물자유연대는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는 달걀 96%는 배터리 케이지에서 사육되는 산란계들이 생산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유럽에서는 9년 전인 2012년부터 이러한 환경에서 닭을 사육하는 것 자체가 법으로 금지됐다며 국내에서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동물자유연대 김솔 활동가는 "동물복지 증진을 위해 배터리 케이지 사육 금지를 농가의 자율에 맡기기보다 강제로 금지할 수 있는 법적인 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공간적 한계가 있는 우리나라 특성상 모든 농가를 자유 방사형으로 변환하기엔 어려운 점이 있으니 적어도 케이지 프리 형태로 키우는 축사 내 사육 방식과 자유 방사형이 혼용되는 형태로 동물 복지를 보장해야 한다"며 동물복지 확산을 위한 정책적인 고민이 추가되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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