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뉴스=나소리 기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소설가의 꿈을 꾸던 중 신춘문예 당선을 마음에 두며 끄적여봤던 소설이다. 한 번의 시도 끝에 부끄럽고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워 덮어뒀지만 문득 주머니 속에서 손 끝에 잡힌 쪽지처럼 꺼내 돌려보고 싶다. <편집자주>

13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오후 4시. 희원과 애린이 쌀국수 집에서 마주보고 앉아 있다. 둘은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이따금씩 희원이 가볍게 미소 짓기도 하고 애린이 깔깔대기도 한다. 시끌벅적한 가게 안이 두 사람의 웃음소리로 가득 찬다.

가을이 지나가며 점차 해가 짧아지는 탓에 저녁 6시에도 금세 어두워진다. 둘은 침묵한 채 시끌벅적한 골목을 함께 걷는다. 둘의 입가에 은은한 웃음이 걸려있다.

“바다 가보고 싶지 않아요?” 애린이 희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희원은 뜬금없는 애린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춥지 않을까요?” 엉뚱한 희원의 대답에 애린이 크게 웃는다.
“더 추워지기 전에 한 번 가보고 싶어서요. 태어났을 때부터 서울에서 살다보니 한강만 잔뜩 봤지, 바다를 별로 못 봤네요. 이제 시험도 떨어졌겠다, 시원하게 바다 한 번 보고 부모님 댁으로 들어갈까 해서요.”
“부모님 댁으로 가는 거예요?” 노량진을 떠난다는 애린의 말에 희원의 목소리가 어두워진다. 그런 희원의 마음을 모르는지 애린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간다.
“벌써 이곳에서 공부한 지 3년이 넘었어요. 스무 살 때부터 독립해서 여기까지 왔네요. 정말 많은 일도 해봤고 남자도 많이 만나봤어요. 그런데 제 쉘은 없더라고요. 10년 가까이 내 쉘만 찾아 해매는 불쌍한 소라게로 살다보니 제 껍질도 이제 말랑말랑해졌어요. 원래는 되게 단단했었는데 어느 순간 이렇게 돼버렸네요. 이제는 그냥 다 싫어요. 쉬고 싶네요.” 혼자서 한참을 떠들어대던 애린이 도로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 곳에 있는 육교를 본 것이리라. 희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14

소라게 한 마리가 여러 쉘 사이에 외로이 서있다. 소라게는 연약한 자신의 복부를 숨기려 맞는 쉘을 발 빠르게 찾는다. 복부를 쉘 안에 고정시키려 쉘의 중축을 강하게 붙잡아보지만 쉽지가 않다. 소라게는 그렇게 여러 쉘에 들락거리며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려 노력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맞는 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소라게가 크디 큰 쉘에 연약한 몸을 숨긴다. 이윽고 소라게의 단단한 껍질이 말랑해진다. 소라게는 그렇게 쉘 안에서 조용히 말랑한 몸을 가지고 숨죽인다.

그 후로도 희원과 애린은 자주 만나 함께 점심을 먹기도 하고 간단히 맥주를 즐기기도 했다. 희원은 애린을 만나는 것이 즐거웠고 점점 그녀가 자신에게 스미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다만 곧 이 곳을 떠날 것이라는 애린의 말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그녀가 간다는 것이 단순히 부모님에게로 가는 것이 아님을 그는 알고 있었다.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그녀가 겁이 났다. 연기는 너무나 달콤해서 함부로 그 연기 속에 손을 집어넣어 휘저을 자신이 없었다. 희원은 달콤한 연기를 휘젓고 싶지 않았다.

15

주말 낮의 한강은 눈부시게 빛난다. 찬바람 속 반가운 햇볕 아래 희원과 애린이 앉아있다.

“한강도 좋네요. 바다는 아니지만…….” 애린의 말에 희원은 은빛 강물을 바라본다.
“우리 다음에는 바다 가요! 가서 그 때는 강물 말고 바닷물이 햇빛에 물드는 거 봐요.” 애린이 웃으며 말하자 희원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런 희원을 아는지 모르는지 애린의 표정은 밝기만 하다. 희원은 말없이 애린의 손을 꼭 잡는다. 애린이 힐끔 희원을 살핀다. 희원은 묵묵히 강물만 바라본다. 알 수 없는 불안함이 희원의 몸을 감싼다. 순간 애린의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애린이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는다.
“네, 네. 조만간 갈게요. 알아요. 아니요, 네네. 네.” 짧은 통화 끝에 애린이 한숨을 쉬며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희원을 보며 애린은 쓴웃음을 짓는다. 집에는 언제 올 예정이냐는 어머니의 재촉전화에 애린의 마음도 초조해진다. 그녀는 망설임에 확실히 결정짓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했다. 스스로에게 갖는 불안감이 희원에게도 전해진 것 같아 애린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애린의 고시원 앞, 희원이 애린을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한강에서의 짧은 통화 후 애린의 말수가 부쩍 적어졌음을 느낀 그였다. 하지만 희원과 애린은 서로에게 갖고 있는 궁금증을 묻지도, 캐지도 않았다. 서로가 가진 불안함을 애써 외면하려 노력했다. 희원은 애린이 고시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보다 이내 뒤돌아섰다.

“소라게…….” 희원은 조그맣게 읊조렸다.

16

애린이 버스 창가 좌석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다. 버스 안으로 비춰 들어오는 햇빛에 먼지가 반짝인다. 애린은 검지로 애꿎은 허공의 먼지를 흩트린다. 반짝이는 먼지가 애린의 검지를 휘감는다. 덜컹이는 버스의 바퀴 소리만이 적막한 버스 안을 가득 채운다.

“엄마, 저 왔어요.” 애린이 고즈넉한 단독주택 대문을 열며 외친다. 그 소리에 애린의 어머니가 걸어 나온다.
“잘 왔다. 고생했다.” 애린은 자신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는 어머니의 손길에 코끝이 시려 옴을 느꼈다. 집 안에 들어서니 음식 냄새가 코를 찌른다. 어머니는 분주하게 주방으로 들어가며 남편을 불렀다. 이윽고 애린의 아버지가 방에서 나와 애린을 맞았다. 애린은 아버지의 표정을 살피며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아버지는 그런 애린을 쳐다보지 않은 채 서재로 들어간다. 애린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어머니가 애린의 앞으로 반찬접시를 밀어주며 애린을 따뜻하게 바라본다. 그런 어머니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애린이 고개를 푹 숙이고 밥을 먹는다. 그간 애린이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대한 질문이 계속해서 날아온다. 애린은 걱정스럽게 자신을 쳐다보는 어머니의 눈길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들지 않고 밥을 먹는다. 이제 어떻게 살 것이냐는 어머니의 말에 애린의 젓가락질이 멈춘다.

“그만 하고 들어와. 아버지도 걱정 많이 하셨어. 너 그만큼 했으면 됐어. 네가 정말 노력했다는 거 우린 안다. 널 원망한다거나 손가락질하려는 게 아니야. 이제 정말 현실을 봐야하지 않겠어?” 어머니가 간절한 눈빛으로 애린을 바라본다. 애린이 대답하지 않자 어머니도 이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밥을 한 술 뜬다. 한참을 젓가락과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린다. 곧 아버지의 젓가락질이 멈추고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그만하고 들어와라.” 말을 마친 아버지가 안방으로 들어간다. 애린은 여전히 고개만 푹 숙인 채 밥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집어 삼키고 있다.

17

오늘따라 어두운 애린의 표정에 희원의 표정이 덩달아 어두워진다. 무슨 일 있냐는 희원의 거듭된 질문에도 애린의 입은 열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술 취한 여러 무리들이 흥이 난 목소리로 그들이 앉아있는 벤치 옆을 지나간다. 애린은 희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한참동안이나 눈을 감고 있다. 더 이상 묻기를 포기한 희원도 애린의 머리가 떨어지지 않게 어깨를 곧추세운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자 역 주위의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진다. 갑작스레 세찬 바람이 한 줄기 불자 애린이 몸을 부르르 떨며 옷깃을 여민다. 희원이 애린의 손을 잡고 일어나자는 제스쳐를 취한다. 하지만 애린은 희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 눈을 감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희원이 다시 어깨 위 애린의 머리를 고정시키는데 애린이 입을 열었다.

“정말 이상해요. 세상의 많고 많은 소라게들은 저마다 자신에게 꼭 맞는 쉘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왜 나만, 나만 없을까요? 이젠 정말 지쳤어요. 난 내 몸 하나 편히 누울 쉘 하나 갖고 있지 않잖아요. 단단한 줄로만 알았던 내 껍질도 이젠 말랑해질 것 같아요. 이렇게 바닷물에 휩쓸리면 전 마디마디 끊어져버리겠죠?”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마친 애린이 조용히 흐느낀다. 눈과 입을 꾹 다물고 어깨만 들썩이던 애린이 희원의 어깨에서 머리를 뗀다. 애린이 고개를 숙이자 애린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진다. 애린의 허벅지가 눈물로 흠뻑 젖어간다. 희원은 그런 애린을 가만히 바라본다.

“누구나 인생에서 절망하는 순간은 와요. 누구는 처음 사회에 나가 막내로서 허드렛일들을 도맡아 할 때 '왜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지?'라고 생각하며 자존감을 잃어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끝까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죠. 누군가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가진 게 너무 많아 그 속의 진짜를 찾지 못하기도 해요. 지금 애린씨처럼 최선을 다 했지만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도 지금 이 순간 절망하고 있겠죠. 하지만 극복해야 해요. 그래야 스스로 자신을 찾을 수 있고, 절망의 나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진정한 사랑을 지킬 수도, 찾을 수도 있는 거예요. 원래 신은 각자가 버틸 수 있는 만큼의 고통만 준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애린씨가 겪는 고통은 애린씨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크기일거예요. 정말 버틸 수 없는 고통이라면 애린씨 옆에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희원이 애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희원의 말을 들은 애린이 희원을 바라본다. 그런 애린의 눈물을 닦아주며 희원이 말을 이어간다.
“내가 애린씨의 쉘이 될 수도 있잖아요.” 장난스러운 희원의 말에 애린이 눈물을 멈추고 희원을 껴안는다. 애린이 희원을 안은 채로 아랫입술을 꽉 깨문다.
“우리 바다 가요.” 애린의 말에 애린의 등을 쓸고 있는 희원의 손이 멈춘다. 희원의 시선이 애린에게 고정된다. 잠시 흐르던 침묵을 깨고 희원이 대답한다.
“그래요. 가요.” 서로를 꽉 껴안은 희원과 애린의 머리 위로 가로등만이 밝게 빛나고 있다.

18

희원은 기차역에 홀로 서있다. 밤 10시까지 만나기로 했던 애린은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희원은 애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받을 수 없다는 안내 음성만이 희원의 휴대전화를 가득 채운다. 희원은 역 안 의자에 앉아 여러 번 서고, 출발하는 기차를 바라본다. 그렇게 시간이 자정을 넘자 희원은 천천히 일어나 기차역을 벗어난다. 여전히 애린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희원이 익숙하게 노량진 역 앞 벤치로 발걸음을 돌린다. 고요한 밤. 가끔씩 불어대는 가을바람 소리만이 희원의 몸을 싸늘하게 감싼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음성이 끊기며 삐-소리와 함께 녹음이 시작된다. 한참 말없이 휴대전화만 귀에 대고 있던 희원이 어렵사리 입을 뗀다.

“그 때 애린씨가 그랬잖아요. 맞는 쉘이 없어 전전긍긍하다보니 어느새 껍질이 말랑해질 것 같다고. 이러다 온 몸이 끊어져 바닷물에 흩어지는 거 아니냐고. 내가 소라게를 잘 몰라서 정말 열심히 찾아봤거든요? 바다로 가는 애린씨 옆에서 내내 말해주고 싶어서. 소라게들은 몸이 더 커지고 껍질이 단단해지려고 탈피(脫皮)를 한 대요. 그 전까지는 조용히 밑에 숨어서 힘겹게 껍질을 벗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힘들게 탈피를 하고 나서도 말랑해진 껍질을 단단하게 말리려고 쉘 안에 숨어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난 탈피 중이었던 애린씨가 내 안에 잠시 숨어 있었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사실 애린씨가 바다 가자고 할 때마다 겁이 났어요. 넓은 바다 속으로 소라게처럼 애린씨가 가라앉아 버릴까봐. 부디 더 단단해진 껍질로 애린씨에게 꼭 맞는 쉘 안에 들어가길 바랄게요. 미안합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벤치 앞에 도착한 희원이 힘없이 벤치에 앉는다.

소라게가 바위 밑에서 말랑해진 몸을 말린다. 벗어놓은 허물을 오독오독 씹어 먹으며 소라게는 긴 시간을 움직이지 않는다. 세차게 물결치는 바닷물은 위협적으로 소라게를 밀어낸다. 이윽고 단단해진 껍질의 소라게가 조심스럽게 자리를 떠난다. 위협적이던 바닷물에 어느새 몸을 맡긴 채 그렇게 소라게는 사라진다. 소라게가 떠난 자리에 빈 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저작권자 © 팝콘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